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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침 May 07. 2024

아주 낮은 확률의 조합

- 니콘 FM2

ⓒ 스침



# 간판의 국적

- 얼마 전 "일본어 간판이 문제"라는 요지의 기사를 보았다. 당최 문제의식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난 한식집에 일본어 간판을 달아도 재밌지 싶은데 말이다. 그런 논리라면 영어 간판도 꼬집어야 하지 않을까? 대체적으로 요즘 기자들의 소양과 인식이 전만 못하다.


- 무릎을 치고 밑줄 치며 읽었던, 짧은 기사에도 기자의 문장력과 호흡이 드러나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으려나. 무릇 기사란 퇴고되지 않은 허섭한 이 글과는 다르지 않은가. 가물에 콩 나듯 혀가 내둘러지는 솜씨의 기자를 보긴 하지만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다.    




ⓒ 스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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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술을 권하는 낡은 골목

- 주량도 줄고 촬영으로 목적이 바뀐 외출에서 낡은 골목에 들어서면, 낮술이 고플 때가 있다. 솔직히 나는 낮술에 약하다. 얼굴이 새파랗던 시절에도 술시가 되어야지 낮술 앞에선 주눅이 들었다. 주변의 주당인 글쟁이와 환쟁이들 성화에 못 이겨 을지로, 충무로, 인사동, 종로 골목에 끌려가면 떨어지는 해보다 먼저 내가 나자빠지곤 했다. 석양보다 붉어진 얼굴로 골목을 빠져나오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걸 보니 늙긴 늙은 모양이다.



      



ⓒ 스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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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 세대의 아날로그 감성

- 흑백 필름 한 롤을 현상한다는 핑계를 대고 충무로에 간 건 필름도 자동으로 감기고 초점도 자동인 후기형 필름카메라가 싫증 나서였다. 완전 기계식 카메라, 그중에서도 니콘 FM2를 점지하고 나선 길이었다.


- 투덜대며 가파른 계단을 3층이나 올라가자 협소한 현상소 안은 한산한 밖과 다르게 북적였다. 나말고는 모두가 젊은이들 아닌가. 워런 버핏이 AI를 병 속에 집어넣을 방법이 없는 호리병의 지니에 비유하는 세상에 대체 이 젊은이들은 낡고 불편한 방법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거지? 첨단의 세상에 대한 일종의 반동일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지하철에서 만나 '급식'이 유튜브 짤을 재생속도를 높여 보고 있었다. 그런 세상이다.    


ⓒ 스침

# 시대를 앞선 재능

- 환승한 전철엔 앉을자리가 없었다. 피곤한 눈이 한 장면을 포착했다. 녹색 야구모자를 눌러쓴 한 늙은이가 메모를 해가며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책 읽는 늙은이는 희극배우 전유성 씨였다. 나는 그를 알지만 그는 나를 모른다. 먼저 인사하고 사인받고 셀카를 부탁하는 건 무례한 짓이다. 마침 자리가 나 그이 옆에 앉자,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요즘도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세요?"

그의 시선이 한 시간 전쯤 수중에 넣어 어깨에 둘러멘 니콘 FM2에 닿아 있었다.

"저, 사실 선생님과 혜화동에서 술자리를 한 적이 있어요. 36년 전쯤."

그 짧은 인연을 기억해내지 못한 눈치였지만 대화를 이어가기엔 충분했다.

그는 지리산에서 살고 있으며, 하던 국숫집은 접었고, 돈 안 되는 일이 생겨 하노이에 간다고 했다.

짐이 고작 작은 배낭 하나냐고 했더니, "외국에 들고나갈 게 뭐 있나요. 들고 올 거는 있어도"라고 한다. 그 다운 말투다. 일회용 속옷 몇 벌만 들었다며 대뜸 가방을 연다.

이제껏 하신 일 중에 뭐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엔 청도에서 10년 간 했던 <개나 소나 콘서트>를 손꼽았다. 보신탕 문화를 지적하던 프랑스의 인식을 바꿨다는 것이 이유였다.

요즘은 뭘 하시냐고 묻자, "우리 딸이 아빠는 돈 안 되는 일로 왜 그렇게 바쁘냐고 한다"라고 한다며 답을 대신했다. 

대중은 그를 개그맨의 시조 혹은 예능인 정도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방송작가이자 공연 기획자 이전에 아이디어뱅크였다. 인사동의 '학교종이 땡땡땡' 같은 복고풍 카페, 심야 볼링장과 심야극장 등을 창안했고, PC 보급 초기 <컴퓨터, 1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등의 베스트셀러를 펴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시대를 앞선 재능을 선보인 인물이다.            

ⓒ 스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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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작고하신 오리 전택부 선생, 이호재 전무송 선생 등과 얽힌 일화 등을 소재로 두 늙은이의 수다는 이어졌고,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가을에 지리산에서 '웃기는 요리대회'를 열 테니 놀러 오셔"란 초대에 꼭 그러마겠다는 답을 하고 헤어졌다. 책 읽는 산사람과 사진 찍는 섬사람의 아주 낮은 확률의 만남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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