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아비가 09화

부러움과 서운함

by 스침

더러더러 당신에게 경쟁하거나 비교하지 말고 살아달라 말 한 적 있지? 뜬구름 잡는 소리지, 어떻게 그렇게 살겠어. 지나친 비교와 경쟁으로 열등감에 빠지거나 좌절하지 말았으면 하지 거지. 살아보니, 잘 난사람 천지고, 부러운 놈 한둘이 아니더라. 예전 같았으면 난 질투로 몸살을 앓았을 거야. 열등감으로 상대의 잘남을 폄하하기 바빴겠지. 분명 꼼수나 뒷배가 있어서일 거라면서. 편법이나 위법인 경우도 없진 않겠으나 실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많은 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않을까. 나는 1/n에 불과하잖아. 오래전 은사님이 “쟤는 5등 안에 들 자신이 없어 등단을 못한 거야”라며 폐부를 찌르신 적이 있어. 자리를 파하고 뒤돌아서며 부끄러웠어. 변명이겠으나 타자의 공식적 평가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어 다행이다 싶기도 해.


예술은 창작자의 콤플렉스에서 탄생한다고 하잖아. 이 명제가 맞다면, 나의 콤플렉스는 예술가가 되기엔 부족했나 봐. 아니면, 콤플렉스가 예술성으로 발현되지 않고 열등감으로만 작동해 질투심만 증폭시킨 거지. <질투는 나의 힘>이란 영화가 있었지, 아마. 당시 신선한 제목이라 생각했었지만 결코 질투는 힘이 될 수 없어. 골퍼들 사이에 “힘 빼는 데 10년 걸린다”는 속설이 있어. 몸이 경직돼서는 정확한 샷을 할 수 없어서지. 질투가 그래. 마음을 경직시켜서 사리판단을 흐리게 만들거든.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질투심을 다른 감정으로 치환할 수는 없을까? 이를테면 부러움으로 말이야.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이 있지만 부러움은 승패의 개념이 아니야. 질투와 달리 부럽다는 감정은 타인에 대한 존중을 기본값으로 하지. 난 당신이 상대의 뛰어남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칭찬하면서 부러움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되길 바라. 만약 그 상대가 나이스한 사람이라면 당신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높아.


좋은 책 한 권을 읽고 있어. <지극히 사적인 일본>이란 책이야. ‘아사히 신문’의 기자였고, 한국에 머물며 영화평론을 하는 나리카와 아야란 저자의 책이야. 구성도 좋고, 글맛도 그만이라 추천하고 싶어. 작고하신 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읽었던 내가 일본인이 한국어로 자신의 모국 일본에 대해 새삼 깨달은 사실을 담아낸 책을 읽게 될 줄이야. 그만큼 한국 출판의 방향과 콘셉트, 문화의 중량이 달라진 거지. 저자의 글맛이 좋다고 자신할 수 있는 건 예전에 그의 원고를 직접 받아 교정한 일이 있어서야. 어지간한 한국 필자들보다 훨씬 잘 쓴 글이었거든. 그가 굳이 남편과 떨어져 한국에 살면서 얼마나 공들여 기량을 갈고닦았는지 알 수 있었어. 잔뜩 그를 부러워하는데 하필, 책상 위 먼지 잔뜩 뒤집어쓴 일본어 교재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나 참.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인의 서운하다는 감정을 정확히 번역할 일본어 단어가 없다는 거야. 예를 들어 누군가가 큰 일을 치른 뒤, 친구에게 뒤늦게 소식을 전하면 "서운하다, 얘"라고 하잖아? 이걸 일본어로 번역하기 어렵다는 거지. 일본인들은 서운하다는 감정을 못 느낀다는 건가? 아니면 감정은 있되 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해 단어화 되지 못했다는 건가? 그런 것까지는 나와 있지 않더군. 반면에 우리는 서운하다는 감정을 너무 자주 느끼지 않나 싶어. 다른 사람은 물라도 나는 그래. 귀가했는데, 강아지들이 나를 썩 반기지 않아도 서운하거든. 아닌 척 하지만 그만큼 나는 관계지향적 성향을 가진 모양이야. 기대하지 않으면 서운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뭘 그리 만사에 기대하며 사는지. 독한 여름이 당최 식지 않는데, 뭉게구름은 얼마나 포슬포슬한지, 산보나 나갈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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