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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Feb 25. 2024

아주 느린 종이컵

느리더라도 꾸준히

위대한 일은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느리지만 작은 일들이 이어질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 빈센트 반 고흐






한때 신념처럼 붙잡았던 말이 있다. 바로, ‘tipping point’, 갑자기 뒤집히는 점이다. 엄청난 변화가 작은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의미다. 한동안 꺼내볼 일 없던 그 말은 종이컵 그리기와 함께 느닷없이 나를 찾아왔다. 두 시간 넘게 종이컵만 그리다 보니, 조바심이 난다. 이래서 전시는 대체 언제 한단 말인가.



충동적인 고백 이후, 가장 놀라웠던 것은 선생님의 반응이었다. 여느 고백이 그러하듯, 판결을 겸허히 기다리던 나에게 의외의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온 것이다. “할 수 있어요! 나중에 공모전도 한번 나가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전시를 빨리 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할 수 있다는 말 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세 번째 수업에 갔다. 심호흡은 필요 없었다. 아이들도 이제 별 반응이 없다. 아마 나를 화요일에 오는 어떤 언니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 나에게 ‘삼다수 그리기’ 미션이 내려진다. 이건, 옆 자리 잘 그리는 학생이 그리던 그림인데. 역시, 나는 우등생이 틀림없나 보다.



완벽한 오만이었다. 도화지 위를 정처 없이 헤맸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연필이 무색할 정도로. 아직 기본기가 부족한 탓이다. 십자를 그린 후, 죄 없는 뚜껑만 한참 노려보다 결국 도움을 요청했다. 선생님은 종이컵을 먼저 그려보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삼다수에서 종이컵으로, 기초로 돌아갔다. 얼마의 고민과 그렸다 지우기가 뒤엉켜 얼추 비슷한 모양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수업이 끝날 무렵이었다.



2시간 넘게 그린 미완성의 종이컵 2개



“이렇게 오래 걸려도 되는 걸까요?” 선생님에게 물었다. 그렇다. 나는 노력형 인간이다. 재능보다는 조바심이 많은, 자신감 부족 노력형 인간. 선생님은 그림에는 정답이 없다고 했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 아주 좋아요.”



그림에는 정답이 없다니.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좋다는 것일까? 정답을 얻으려고 학원을 찾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껏 정해진 기준만을 좇으며 살아온 탓일까. 기준보다는 자유로운 표현이 더욱 특별한 대우를 받는 이곳. 회사가 아닌 이곳에선 모르는 것을 가능성 삼아 그저 천천히 가야 하나보다. 한낱 종이컵이 작품이 되는 그날까지.



“선을 예쁘게 쓰시는데요, 장점이에요.” 기분이 좋다. 종이컵을 오래 그려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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