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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Mar 04. 2024

나의 스케치북 도둑

그 아빠에 그 딸

나와 아내가 성실하고, 올바른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한은 아이들은 거침없이 씩씩할 수만 있으면 된다. 함께 생활하는 동안 아이들은 부모를 닮고, 은연중에 뿌리 깊은 성격구조를 형성해 간다.

- 장욱진






내 안의 예술에 대한 욕구는 종종 '위기상황'에 발동된다. 마치, 무의식 속에 침잠한 방어기제처럼. 팬데믹의 위기 속에서 빈번히 찾은 곳은 다름 아닌 미술관이었다. 초등학교 이후 손을 놓았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미술학원에 다니고 있다. 은연중에 발현되는 나의 예술적인 면모들은 재능보다는 본능에 가깝다.



소파 테이블 위에 펼쳐둔 5절 스케치북 위로 애꿎은 먼지만 쌓여간다. 스케치북의 한 귀퉁이에는 몇 개의 메모와 어설픈 연습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내가 그럼 그렇지. 호기롭게 장만한 스케치북은 본래의 역할을 상실한 채 철저히 방치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멀찍이서 스케치북을 바라보다 미처 끝내지 못한 명도 연습이 완성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다음 날부터 스케치북 위에는 주인 모를 그림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에는 괜한 기대마저 드는 것이었다. 연필도 눈에 띄게 짧아져 있다. 나의 스케치북에 도둑이 든 것이 분명하다. 그림의 주인은 바로 아빠였다.



스케치북 도둑의 흔적이 하나둘씩 늘어간다.



아빠는 자칭, 시 없는 시인이다. 언젠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시들이 빼곡히 적힌 수첩을 본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2년 정도 배웠다는 그림은 나보다 실력이 좋고. 요즘 들어서는 색소폰 연주에 여념이 없는, 시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빠다.



예전에 찍어두었던 아빠의 그림들
나도 좀 더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굳이 따지자면, 아빠는 시가 없지만 딸은 시가 있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백일장에서 시 부문 차상을 받은 적이 있다. 대학교도 논술 전형으로 합격한 것을 보면 전직 국어 선생님 딸은 맞나 보다. (가끔 잔소리할 때는 주워온 것도 같은데.) 이렇게 글도 쓰고 있지 않은가. 음악과 그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함께 예술을 향유하고, 동경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아빠와 동생 그리고 나는 가끔 함께 미술관에 간다.



딸은 아빠를 닮아야 잘 산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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