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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Mar 09. 2024

매운맛 삼다수

대범해져도 괜찮아

심오한 신비로움

- 장 자크 레베크






예상 밖의 심오함은 가히 신비롭다. 삼다수 그리기가 이렇게도 묘할 줄이야. 나는 물맛을 느끼는 편이라, 줄곧 삼다수를 애용해 왔던 것을. 평생의 물이라는데, 다시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미술학원에 다닌 지 이제 2개월 차에 들어선 나는 은은하게 매운맛, 삼다수 그리기를 시작했다.



새로운 도화지를 받았다. 요즘 나의 즐거움이자 과제, ‘공백 채우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글이든 그림이든. 즐겁다고 해서 결코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얀 도화지를 받아 들었을 때의 두려움은 공포라기보다는 의지의 피력에 가깝다. 잘 그리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경직되는 것이다. 내 마음을 모르는 도화지는 오늘따라 괜히 더 커 보인다.



연필을 깎고 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선생님은 먼저 윤곽을 그린 다음 세세한 부분을 잡아가자고 하셨다. 뚜껑부터 바닥까지 가볍게 그린 후 비율을 맞춰갔다. 잠시 집을 나가버린 투시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금세 돌아왔다. 스케치가 얼추 완성될 즈음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정도 지난 것 같다. 어째 벽돌을 그릴 때보다 오래 걸린 느낌이다.



삼다수 좋아했는데…



음영을 넣어줄 차례인데 막막하기만 하다. 일주일 전의 나는 왜 흔쾌히 삼다수를 그리겠다고 선언했을까? 물이 담긴 투명한 페트병을 단지, 연필로 표현해 내야 한다니. 4-5장짜리 레퍼런스만 몇 번을 넘겨댔는지 모르겠다. 모르면 무서울 것이 없다고 벽돌은 생각 없이 그렸던 것 같은데. 그새 생각은 많아졌고, 손은 굼떠졌다. 답답하다, 답답해!



시계를 흘끔거렸다.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이들이 그토록 집을 갈망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는지 선생님은 빛의 속도로 윗부분의 음영과 함께 내 멘탈을 잡아주셨다. 기준을 조금 낮추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으로.



나도 참 여전하다.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이 완벽주의 성향. 즐기자고 시작한 취미에 덤벼 스트레스나 받고 있다니 말이다. 변덕이 심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꾸준히 그림을 그리려면 지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가올 수업시간에는 마음을 가볍게 텅 비워볼 생각이다.



초등학생 때 백일장에서 썼던 시가 떠올랐다.



어른이 된 지금은 잃어버린 20여 년 전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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