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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Apr 10. 2024

기꺼이 하는 그림

애정의 의미

예술가는 탐험가다. 그는 자기 발견과 자신의 절차에 대한 관찰로 시작해야 한다. 그 후 어떠한 제약도 느끼지 말아야 한다.

- 앙리 마티스






치기 어린 날에는 두근거림이 애정의 척도라 믿기도 했다. 30대 중반에 와서야 무언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설렘이기보다 대상을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하는 마음'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른다. 만약 누구든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들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한 애정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애정에도 각자의 절차가 있어 비록 그 모양과 속도는 다를지라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내가 오늘도 어김없이 책상 앞에 앉는 이유는 피곤하지만 그림이 좋아서다.



머리맡에는 스탠드와 함께 은색 블루투스 스피커가 놓여 있다. 스피커와 아이폰이 연결되었음을 알리는 경쾌한 신호음과 함께 방 안을 가득 메우는 이 곡은 내내 푹 빠져있는 Daniel Caesar(다니엘 시저는 캐나다 출신의 R&B 싱어송 라이터다.)의 ‘Always’. 후렴에 이런 구절이 있다. I’ll give you time and space. 사랑하는 너를 위해 기꺼이 나의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겠다는 다짐은 치장한 고백보다 진실하다. I’m always-ways-ways. 언제나 그럴 거란다.



기초부터 혼자 해보는 그림



조명에서 새어 나오는 노르스름한 빛이 간신히 어둠을 밝히는 밤. 적당히 자그마한 테이블 위는 늘어난 화구들로 어수선하다. 세로 놓인 8절 스케치북에는 달걀 프라이 소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요즘 나는 매일 저녁 그림을 그린다. 그리 대단한 그림도 아니지만 스케치를 하고 톤을 올리다 보면 금세 잘 시간이 되어버린다. 온몸에 들어갔던 힘을 빼고 음악과 연필을 흐르는 대로 두다 보면 그럴싸한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화구 정리함을 사야할 것 같다.



아크릴화를 꿈꾸던 2월의 나는 여전한 실력에 머물러있지만, 미술용품에게만은 참을성이 없는 듯하다. 좋은 연필과 미술용 지우개 정도면 될 것 같았던 소묘의 세계에는 유용한 도구들이 많았다. 최근에 장만한 것들 중에 니더블 지우개와 전동 지우개는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해주고 있다. 소묘에서 지우개는 ‘하얀 연필’이라는 말이 이제야 와닿는다. 연필은 톰보우 2B와 4B 그리고 파버카스텔 8B를 쓰는데 낱개보다는 다스로 넉넉히 사두는 편이다.



동네의 유일한 화방인 대형 문구점 안쪽에는 미술용품 코너가 있다. 진득한 물감과 갖가지 오일이 뒤섞인 냄새를 맡으며 구석구석을 탐색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얼마 전부터 미술 수업을 다니기 시작한 아빠를 따라갔다가 붓과 종이 팔레트가 생겼다. 조만간 충동구매했던 36색의 오일 파스텔에 페인팅 오일을 섞어 유화를 연습해볼까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캔버스 스케치북도 사야 할 테고. 미술용품은 미술용품을 부른다.



선뜻 소묘를 놓지 못하고 있다. 수채화든 아크릴화든 채색을 시작하기 전 기초부터 충분히 다지고 싶은 나의 고집이다. 학원 선생님은 자칫 내가 지루해질 것을 우려해 수채화를 시작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지만, 결국 연필 소묘를 좀 더 해보기로 한다. 이젤에 앉아 수채화를 그리는 아이들의 옆모습을 이따금 바라보며 강아지 소묘를 하는 나. 강아지가 더 이상 귀여워 보이지 않을 거라던 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달이 걸린 삼다수 소묘



나에게는 4월 한 달, 12시간을 기꺼이 이름 모를 강아지에게 쓸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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