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에 대한 믿음
시작점과 끝점이 만나는 순간에 스스로 안으로 닫히며 완성되는 원은 완결을 추구하는 인생의 은유이지만, 예술가의 삶에 더 가까운 것은 원보다는 나선일 것이다.
-안규철
나선에는 깊이가 있다는 점에서 원과 다르다. 섣부른 완결보다는 느긋한 과정에 치중하려고 노력한 점이 또 이전과는 다르다. 형태와 질감을 찾아가는 과정이 어느 때보다 쉽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그림에서 떨어졌다. 매몰되어 있을 때 도화지를 멀리서 바라보면 신기하게도 갈길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시간을 들이는 만큼 점차 깊이감이 생겼다. 그림에도, 나의 손끝에도.
시험기간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강의실이 유독 한산하다. ‘학생일 때가 좋았지.’ 따위의 식상한 생각을 하며 주섬주섬 도화지를 꺼낸다. 강아지를 그리기 시작한 지 한 달째 되는 날. 오늘은 마무리를 지어보자는 마음으로 2B와 4B연필을 다듬는다. 톤과 묘사가 필요해 보이는 부분에 공을 들여본다. 어디를 손봐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집중력 저하로 인해) 내심 끝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스케치할 때만 해도 강아지가 되긴 될까 싶었다. 털 묘사부터 옷의 주름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강아지의 전체적인 비율과 눈, 코, 입 위치를 잡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다. 초반 스케치는 어딘가 엉성해 보였는데, 두 분의 선생님 모두 과정이 좋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지금은 어색해 보이지만, 그게 맞아요.” 마음을 들켜버렸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응원이 필요한 것일까.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는 그림 하나 완성하기도 쉽지가 않다. 과정에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단단해져야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무수한 경험들이 쌓여 나선을 만드는 동안 믿음이 깊어졌으면 좋겠다. 지레 단정 짓기보다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침내 나타날 나의 그림을.
과정에 대한 믿음과 꾸준함이 결과물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