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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요한 Mar 10. 2024

군생활에 긴 뜻을 포기하다

군생활에 긴 뜻을 포기하다

 그토록 학군단 생활을 열심히 해오던 나는, 2년 4개월 의무복무만 마치고 전역할 것으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오랜 기간 스스로 느껴왔던 나의 부족함이 가장 컸다. 


 일단 첫번째, 오래달리기였다.


 나는 우리 학군단에 있는 그 누구보다 오래달리기 연습에 진심이었다. 왜인진 모르겠으나 체력 3종목 모두 특급은 그냥 자존심처럼 달성하고 싶었다.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는 2분 안에 100개도 거뜬히 채우던 나였지만, 이상하게 오래달리기 만큼은 전혀 늘지가 않았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반드시 뛰었으며, 3km를 뛰면 측정식으로 뛰었고 연습할 때는 5km또는 10km를 뛰었다. 또 학교 뒤에 130고지 정도 되는 작은 산이 있었는데, 정상까지 쉬지 않고 뛰어 올라가는 연습도 많이 했다. 스쿼트와 런지 같은 하체 운동도 틈틈이 했으며, 대중교통 대신 자전거로 자주 이동하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단 한번도 '12분 30초'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주변 동기들은 정신을 놓고 뛰어야 한다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정신을 놓고 뛰었다. 완주 후에 목에 피 맛이 느껴지고 헛구역질이 나오고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어지러운 거면 적당히 뛴 게 아닐텐데..

 선천적인 신체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더 열심히 노력 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내 부족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계기가 있었다.


 3km달리기에 12분 30초가 특급의 기준이지만 나는 항상 12분 40초 ~ 13분 10초의 결과를 받았다. 어느 날 체력이 부진한 동기 한명이, 체력 증진을 위해 내가 운동할 때마다 따라서 같이 운동하기로 약속했다. 딱 한 달 정도 내가 운동할 때마다 함께 했으며 심지어 몇번은 나 혼자 운동하는 날도 있었다. 우리는 같이 뛰는 게 아니라 각자의 페이스 대로 뛰었는데, 처음에는 나보다 한참 느리던 동기가 한 달이 거의 채워질 때쯤 내 페이스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측정 때의 결과는, 그 친구가 12분 31초였고 내가 13분으로 그 동기보다 한참을 늦게 들어갔다. 또, 별도로 운동 시간을 갖지 않지만 단체 아침운동만 나오는 동기 중에서도 12분 30초 내로 들어오는 동기들을 보며 내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두번째, 축구였다.


 오래달리기 기록처럼 넘을 수 없는 벽이 바로 축구였다. 난 왜 어릴 때부터 공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정말 많이 후회했다. 축구를 잘하는 동기나 후배에게 기본기를 배워 늦게까지 운동장에서 혼자 연습하였고, 생전 해보지도 않은 풋살을 해보겠다며 지인들을 따라다니면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경기를 하며 부딪혀 보았다. 축구를 잘 하지도 못하는데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서 욕먹으며 배우겠다는 용기 하나는 대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가 곧장 있을리가, 항상 공이 내 앞에 오면 긴장이 되어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하면 할 수록 주눅만 들었다.


 일단 흥미가 있어야 계속 했을 텐데, 사실 흥미가 없었다. 그냥 군대에서 늘상 자주 하는 게 축구이고 무시 받지 않을 정도로 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내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세번째, 인정 받지 못함이었다.


 당시 학기별로 학군단 임원을 선발 했었는데, 나는 항상 임원에 선발되지 못했다. 3학년 1학기때 처음으로 임원을 한 후로는,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도 임원을 한 적이 없다. 임원을 하는 동기들보다 나는 체력도 좋았고, 훈련 성적도 좋았고, 학교 학점도 좋았는데 왜 그들은 되고 난 되지 않았을까 정말 억울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임원 선발에 관련 된 모든 결정권은 학군 단장님한테 있었으며, 그분은 정말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이었다. 축구를 할 때 눈에 띄게 잘 하는 동기들이 대부분 임원이 되었고, 축구도 못할 뿐더러 종종 고기와 술을 사주시는 단장님께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은 내가 임원이 될리는 없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평소 눈에 띄는 사람이 먼저 생각나고 한 자리 맡기고 싶은 사회조직의 원리를, 그때는 어려서 알지 못했다. 그냥 나는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슬퍼했던 기억이 있다.


 네번째, 내 음악을 찾기 시작해서였다.


 음악에 진로를 찾지 못해 무엇을 할까 방황하다 학군단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학군단을 하며 나만의 스토리가 생기기 시작하자 나만의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론으로 배우는 실력적인 것이 아닌, 나만의 색깔을 나타내는 음악을 통해 남들이 감동을 받는 것을 보며 설명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

 이때부터 평생 음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생계는 다른 수단이 될 수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음악을 해야겠다는 목표가 생겼고, 군생활은 2년 4개월 짧게나마 경험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섯번째, 군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들어서였다.


 학군단 후보생 때는 야전 부대의 분위기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교육과 훈련 등이 전부 실질적이고 현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며, 평가 기준들은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또 높으신 분들의 지침이 곧 법이 되는 군의 폐쇄적이며 권위적인 분위기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내가 군에 긴 뜻을 포기한 후 그 포기에 타당성을 제시하는 핑계들일 뿐이었다. 내가 군에서 빛을 낼 것 같은 사람이었다면 아마 계속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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