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플로베르/ 문학동네
하지만 사실 그녀는 갈망과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주름이 똑바로 잡힌 그녀의 드레스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려주었고, 그토록 음전해 보이는 입술은 번뇌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레옹을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모습을 편안하게 떠올리며 즐기기 위해 혼자 있고 싶었다. 그의 모습을 직접 대하면 상상에서 느끼는 쾌락에 방해가 되었다. 그의 발소리를 들으면 에마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가 눈앞에 나타나면 감동이 약해지고 커다란 충격만 남았다가 결국은 슬퍼지곤 했다. p.156
여기 절친인 두 친구가 있다. 플로베르는 1849년 장편소설 <성 앙트완느의 유혹>의 첫 원고를 뒤 캉 Du camp과 루이 부이예 L.Bouilhet에게 읽어주고 소견을 물었다.
뒤 캉 : 원고를 불태우고 다시는 입 밖에도 내지 말라!
루이 부이예 : '시골 공의 아내가 벌인 간통 이야기' <들로네 사건>을 써보는 게 어때?
플로베르는 부이예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4년 반이란 시간을 들여 마침내 세상에 빛을 본 작품이 바로 <마담 보바리>다.
민음사와 문학동네 중 어디를 읽어야 하나 고민하는 분들이 많아 짧게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일단 민음사의 번역가는 1999년 최고의 불문학 번역가로 선정된 김화영교수다. 문학동네는 김남주, 여성 번역가다. 남성, 여성을 나누는 것이 고루할 수 있겠으나 두 분의 스타일이 완전 반대여서 각자 취향에 맞는 걸 선택하면 좋을 듯... 민음사는 일단 정말 고전소설이구나를 느끼게 해 준다. 좋게 표현하면 친절~ 나쁘게 표현하면 올드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 마지막 해설 부분은 민음사가 훨씬 좋았다.
대신 문학동네 번역은 요즘 스타일이다. 가장 최근에 한 번역이기도 하거니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거두절미하고 딱 깔끔하다. 가독성이 훨씬 좋았다는 평가가 압도적이었다. 두 출판사의 첫 문장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우리가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려니까 교장 선생님께서 어떤 평복 차림의 신입생과 큰 책상을 든 사환을 데리고 들어오셨다. _ 민음사
우리가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교장이 평상복 차임의 신입생 한 명과 커다란 책상을 든 급사를 데리고 들어왔다. _문학동네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시길...
<마담 보바리>의 재미있는 점은 시점의 이동인데, 마치 영화의 인트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눈으로 본 신입생 샤를을 시작으로 샤를의 부모, 어린 시절, 첫 번째 부인과의 짧은 결혼생활을 지나 드디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에마로 시점이 넘어오기 때문이다. 서문에 해당하는 1부를 쓰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고 하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더라도 인내심을 가지시길. 진짜 스토리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또 다른 재미는 작가가 인물들에게 부여해준 이름의 의미에 있다. 과학과 진보신봉자인 약사 오메Homais는 '호모 Homo' 곧 '인간'에서, 여러 인간을 돈으로 파멸시키는 뢰뢰Lheureux는 '행복한 자 heureux'라는 이름이 붙는다.
주인공 '에마 Emm)'의 이름은 고대 게르만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체', '만족'을 의미한다.
또 다른 주인공 샤를은 ridiculus sum. 라틴어로 '나는 우스꽝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을 스무 번 베껴 쓰도록 지시한 교사의 숨은 뜻을 잘 살펴보시길.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점은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세명의 여성이다. 바로 샤를의 엄마인 노부인 보바리, 첫 번째 부인 과부 뒤비크,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에마.
노부인 보바리는 왜 아들에게 집착하게 되었을까? 남편의 잘생긴 외모 하나 믿고 결혼했으니 그것이 바로 그녀의 발등을 찍을 줄이야! 남편이란 작자는 아내의 지참금으로 풍요로운 한량생활을 하고 돈을 벌겠다고 사업에도 뛰어들지만 계속 돈만 까먹을 뿐이었다. 마흔다섯 살이 되어서야 인간에게 환멸을 느껴 세상과 담쌓고 사는 남편에게 더한 환멸을 느낀 인물이 바로 샤를의 엄마였다. 남편에 대한 사랑이 식자 그 대상은 아들에게로 옮겨졌다. 그녀는 무기력에 빠진 남편을 대신해 집안일을 해내야 했고 아들의 출세를 위해 의사를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천성적으로 양순한 아이였던 샤를은 엄마의 꿈을 투사하기에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프랑스판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 막 개업한 아들에게 맞는 여자가 누구일까? 돈 좀 있는 못생긴 과부를 점찍는 심리는 무어라고 해야 하나? 프랑스나 한국이나 시어머니는 왜 이렇게 그려지는지, 이런 걸로 시대를 관통한다는 느낌을 받는 게 너무 씁쓸할 지경이다.
샤를의 첫 번째 부인은 천 2백 리브르의 연금을 받고 있던 45살의 과부 뒤뷔크 부인이다. 결혼을 하면 자신 맘대로 돈도 쓰고 자유로울 거라 생각했던 샤를의 삶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집착과 감시가 엄마에서 부인으로 바통터치가 되었을 뿐이다. 작가가 심어놓은 모든 장면 묘사 하나하나는 그냥 박아놓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뒤뷔크 부인의 외모 묘사는 샤를이 에마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토씨 하나 달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된다. 그것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일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이 과부는 비쩍 말랐고, 치아가 길쭉했다. 일 년 내내 두르고 있는 검은색 숄은 너무 작아서 그 끝이 어깨뼈 사이에 늘어져 있었다. 원피스 안에는 뻣뻣한 몸이 칼집 속의 칼처럼 들어 있었고, 치마는 너무 짧아서 잿빛 긴 양말 위로 십자 모양으로 끝을 맨 펑퍼짐한 구두와 발목이 훤히 드러났다. p.35
루오영감을 치료해 주기 위해 찾아간 베르토 농장에서 샤를은 그의 딸 에마를 보게 되고 마음에 품게 된다. 뻔질나게 베르토로 가는 남편의 뻔한 속내를 다 알고 있던 뒤뷔크의 성화와 아들 부부를 보러 어머니가 올 때마다 두 사람의 잔소리는 모두 샤를을 향해 있었다. 뒤뷔크의 돈을 관리하던 공증인이 그녀의 돈을 들고 달아난 사건에 충격을 먹고 마당에서 빨래를 널다 사망하게 된다.
어이없는 그녀의 죽음을 두고 가장 불쌍한 여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적어도 에마는 자신의 죽음까지도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샤를과 에마의 결혼식은 속전속결로 치러지고 출근하는 샤를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랑스러운 새색시 에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골 농장주의 딸이었던 에마는 아내와 아들을 잃은 루오 영감 밑에서 자라게 된다. 돈은 제법 있는 쁘띠 부르주아였던 아버지는 딸을 기숙사 학교에 보내고 그녀는 그곳에서 우등생으로 잘 자라는 듯 보인다.
수녀원 학교에서 에마는 수녀들과의 생활을 좋아했고 교리문답을 잘 이해하고 보좌신부의 어려운 질문에도 대답하던 학생이었다. 모범생이었던 그녀가 변하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바로 상급학생들만 보던 소설책을 접하고 나서이다. 영주의 저택, 굴곡이 드러나는 드레스, 검을 말을 탄 기사이야기는 지금도 변하지 않는 단골 콘텐츠가 아니던가!
이제부터 소설은 허영에 가득 찬 에마의 몰락을 순차적으로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샤를은 에마의 관심사인 음악이나 문학에도 관심이 없었고 수영, 검술, 사격도 할 줄 몰랐으며, 소설에 나온 승마용어도 설명해 주지 못했다. 대화 단절의 단적인 예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보통 여자들은 남자의 지적인 면, 일에 몰두하는 모습에 매력을 느끼게 마련인데 이 남자 너무 무식하다. 이폴리트의 다리 수술에 실패한 남편을 보면서 에마는 한 줄기 희망마저 놓아버린다.
하지만 남자라면 모름지기 모르는 것이 없고 여러 활동에 뛰어나며 열정적 원기와 세련된 생활과 온갖 신비로운 것으로 상대를 이끌어주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 남자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했고 아는 것도 없었으며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행복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녀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평온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둔감함, 자신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를 원망해다. p.65
시골의사부인으로 생활하게 된 에마는 행복한 신혼생활을 보내지만 그것도 잠시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은 권태라는 선물 앞에 무너지고 만다. 이런 권태를 이기는 힘이 아마도 인강의 몽상, 상상이 아닐까?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에마는 인스타의 셀럽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다.
눈앞의 현실이 아니라 꿈꾸는 환상을 살고자 했던 보바리를 통해 나는 어떤 현실을 붙잡고 있는지, 또 어떤 허상을 쫓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사랑, 사치, 타락,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던 에마야말로 행복한 인간이라고 했던 후기가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 자신이 곧 보바리라고 했던 플로베르의 문장에 푹 빠져보시길...
여자의 의지는 끈으로 고정된 모자에 달린 베일처럼 바람에 사방으로 펄럭인다. 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관습에 제약당하고 만다.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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