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으며 엄마 생각이 났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상적 존재는 묻혀있는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 시대가 가장 감쪽같이 덮어놓고 묻어놓은 것은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임을 강조한다. 또한 그렇게 덮어놓은 사실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라고 정의했다.
과연 그렇다. 어릴 때 같이 살던 할아버지가 건넛방에서 돌아가시고 관이 땅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다.
한 때 나와 한 몸이었던 엄마가 죽었다. 그 거짓말같은 현실 속에서 장례식이 시작됐다. 모든 것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빈소가 설치되고 영정 사진이 걸렸다. 사진 속에서 엄마는 아픈 시간들이 지나갔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와 아버지 동문회에서 근조기와 화환을 보내주셨다. 가족들이 검은 상복을 입고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고모들과 이모가 눈물을 훔치며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3일간 밤을 새듯 보내고 나니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어떤 것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삶이 안개와 같이 짧다는 것이 실감났다. 엄마의 임종과 장례를 눈 앞에서 지켜보고 나니 감정의 소용돌이가 뒤늦게 밀려왔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엄마를 보내야 한다는 슬픔, 황망함, 이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엄마의 모습을 목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기적인 안도감, 엄마가 천국에서라도 평안하길 바라는 절실함,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는 염원같은 것들이 뒤섞여 나를 휩쓸었다.
뇌종양으로 투병하며 차례차례 언어를 잃고 균형감각을 잃고 근력을 잃어가는 엄마를 보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을 잊고 살 때는 생명의 감각도 희미했는데 가장 가까웠던 사람의 마지막을 보며 오히려 삶이 또렷해졌다. 살아있는 것도,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넘어지지 않고 걷는 것도 다 선물이고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게도 다가올 죽음 앞에서 그저 납작 엎드려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임종 직전 소생술을 시도한 의료진들도,
화환과 근조기로 장례식장을 채워준 지인들도,
염습 과정에서 엄마를 정성들여 화장하고 몸을 닦아준 장례지도사도,
부고를 듣고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현란한 무늬가 그려진 주황색 스웨터를 입고 온 친구도
떠난 자와 남은 자에 대한 최선의 마음을 성심껏 표현한 것일터다. 설령 그것들이 고인에게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행위일지라도 유족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엄마를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이 빈소를 찾아주는 발걸음이 벅차게 고마워 고개숙여 인사했다.
동굴 속에 사는 사람처럼 죽음을 잊고 살다가 죽음이 눈이 멀듯 환하게 시야를 압도할 때에야 비로소 동굴 속 그림자가 실체의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그 환상조차도 내가 이루어낸 것이 아닌, 값 없이 받은 선물이었음도. 남은 자의 몫은 그 환상 속에서 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함께 걸어준 사람들을 있는 힘껏 사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