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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이앤 Jun 13. 2024

수채화로 시작해서 수채화로 끝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력장애 어른 여자 이야기


나는 주의력 장애가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죠. 왜냐하면 메모를 하거나, 생각을 할 때 나는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림은 내게 집중력을 가져다 줘요.



“그림을 선물하는 건 어때?”



2023년 피앙세 가족의 결혼식 참여를 위해 미국행을 준비할 때예요. 그이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 토박이였고, 그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결혼 선물로 무엇을 할까 고심중 이었죠. 그런데 그림선물이라니!


오랜시간 그림을 그렸지만 나는 그림을 선물해 본 적이 없어요. 선물의 마음 씀씀이는 가격과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에서 살아온 내가 ‘내 그림을 선물로……?’ 하고 의구심을 품었거든요. 그때 그이가 말했어요.


“넌 정말 멋진 아티스트야.”


그의 말에 나는 그림 선물을 하기로 결정하고 곧 곧 캔버스에 작업을 시작했어요.




캐시와 저스틴의 웨딩기프트예요.





실사 인물화는 경험이 없어 캐릭터화 한 그림을 수채화로 그렸어요. 나보다 한창 어린 미국인 커플이 이걸 좋아해줄까, 싶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어요.


 


내 인생 첫 그림선물이 웨딩 선물이라니!




오랜 시간 공을 들였고 미국으로 출발 직전까지 완성이 안 되어 가방에 물감과 붓을 챙겼어요.



< (위) 대나무 수채화팔레트, (아래) 알루미늄 수채화팔레트 >



물감은 포터블 사이즈의 알루미늄 수채화 팔레트를 챙겼어요. 개봉한 물감이라 혹시 입국심사에서 걸리면 어쩌나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문제 없더군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


미국 동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에요. 한국에서는 직항이 없어 환승을 해야하는 곳이죠.  나는 채플힐에 있는 그이의 집에 도착했어요.



17시간 비행 후 피곤한 몸과 달리 이른 아침 눈이 떠지더군요. 13시간 시차 때문이에요. 그나마 다행인건 시간은 정반대이지만 계절감은 비슷해서 당시 채플힐은 한국과 같은 봄이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 주변은 나무가 많아 제법 쌀쌀했죠. 피앙세가 준 스웨터를 껴입고 그가 내려준 드립커피를 마셨어요. 키친 테이블 위에 놓인 나를 위한 꽃을 보며, 새삼 내가 남자를 참 잘만났구나 하며 행복감에 젖었어요.



산속의 외딴집 같지만 그냥 평지에 있는 전원하우스 이에요. 이웃은 도보 5분 거리에  있어요.


해가 더 떠오르고 바깥 온도가 따스해지자 우리는 손을 잡고  집주변을 걸었어요. 나무들 사이로 스미는 온기와 함께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어요.



언덕 하나없이 펼쳐진 지평선 끝까지 수목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곳. 도로엔 가끔 차들이 쌩쌩 지나가고 나뭇잎은 바스락바스락, 바람에 흔들렸고요.



맑은 공기를 마신 후 나는 짐정리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잔디도 정리하고 창고 물건도 버려야해.“


나의 말에 내 피앙세는 웃으며 말하더군요.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자. 이제 막 미국에 왔잖아,”


피앙세는 한국으로 이주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이 집도 팔아야 했죠. 때문에 나는 마음이 조급했어요. 과연 시간 안에 모든 걸 다 처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그의 말처럼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보다 행복한 휴가를 보내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어요.


(좌) 그이는 언젠가 스컹크를 집앞에서 보았다는데, 이건 무슨 동물의 굴일까요? (우) 한국에서 그림으로 그려볼 거라며 어린 단풍나무의 모습도 한번 사진으로 남겨둡니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하루하루를 즐기며, 수채화 작업도 틈틈히 했어요.




키친테이블에 그림과 물감을 늘어놓고 작업 하다 어느 순간 다이닝테이블로 자리를 옮겼죠.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마이클”이라는 화방에 들러 수채화 작업도구를 사기도 했어요.


어딜가나 늘어뜨리기 좋아하고 정리정돈을 못하는 주의력 장애가 있는 나는 미국에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어요.  다행인건, 그림 도구를 얼마나 어떻게 늘어뜨려놓든 내 피앙세는 화내지 않았던 거죠. 집을 얼마나 엉망으로 만드는 건 상관않고 내가 그린 그림을 좋아해줄 뿐이었어요.


프레임에 넣고 포장해서 선물했으나 완성 사진은 찍지 못했어요.


결혼식 이틀전 그림을 완성하고 우리는 샬럿으로 출발했어요. 샬럿은 채플힐에서 자동차로 약 3시간 정도 떨어진, 노스캐롤라이나의 대도시예요.


캐시와 저스틴의 웨딩


결혼식장에서 행복한 두 사람을 보니 나도 이 아름다운 추억과 미래의 기대감을 순간으로 담아 저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두 사람에게는 웨딩 세레모니와 사진이 그 추억 한 페이지가 되겠지만, 나에게는....역시,

그림이겠죠?


그렇게 채플힐의 집으로 돌아와 나는 또다른 수채화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우리의 행복한 추억이 가득한 미국집을 종이 속에 담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목적이었죠. 우리의 한국 정착을 위해 이 집은 곧 팔아야 했거든요. 그러니 이 집에서 지내는 것도 이번 여행이 마지막이 될거예요.


물감을 섞은 것 같은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와 새소리와 아스라히 스며드는 햇빛의




추억이 가득한 그의 집(하지만 그이는 꼭 우리의 집이라고 코멘트를 남기죠!) 을 마음에 남기기 위해 나는 커다란 다이닝 테이블에 도구들을 늘어놓고 시간이 날때마다 그렸어요.




시간 부족으로 마무리는 한국에서 하고, 완성한 그림은 현재 그이의 한국 연구실에 있어요. 이제는 다른사람에게 팔어버린 우리의 채플힐 집과 5월의 노스캐롤라이나는 이렇게 기억되었어요. 어쩌면 그림이 없었다면 나의 덜렁거리고 쉽게 잊어버리는 인생에서 덜 특별했을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를 순간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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