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스물넷이야
괜찮아, 스물넷이야
3. 그곳에서 나를 괴롭혔던 건 (1)
얼마 전 가족 외식을 나갔을 때 친오빠가 해준 말이 있다.
“얘는 인생이 탄탄대로야. ‘그거’ 하나 빼고는 실패했던 게 없어.”
나는 가족들에게 깊은 속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올해 들어서는 심리상담도 20회기 넘게 다니고 있는데, 여전히 가족들에겐 비밀이다. 언젠가는 이야기할 날이 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용기가 잘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먼저 어두운 면들을 꺼낸 적이 없기에, 그들은 내 깊은 아픔이나 짙게 자리 잡은 마음의 상처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겉으로 보기엔 늘 헤실헤실 웃고 재밌게 적당히 인생 즐기며 사는 것 같으니 오빠도 그런 말을 꺼낸 거겠지. 내 눈엔 나보다 오빠가 훨씬 더 탄탄대로 인생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는 이해가 가고, 비난하거나 원망할 생각도 딱히 없다.
대학 입시도 한 번에 성공해 명문대 진학, 임용고시도 한 번에 합격. 남들 눈엔 누가 봐도 탄탄대로 같은 인생이 아닌가.
세간의 기준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조금 더 깊숙한 곳의 내게는 전혀 아닐지라도. 그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요즘 내가 조심스럽게 풀어나가고 있는 아픈 속앓이이다.
“아니거든. 알게 모르게 진짜 실패한 거 많거든.”
동의하지 않는다고 작게 구시렁거렸지만, 오빠가 말한 ‘그거’에 대해서만큼은 마음 깊이 사무치도록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남들이 보기에도, 그리고 나에게는 정말로 정신적으로 커다란 위협이 될 만큼 큰 ‘실패’였던 그 사건. 바로 교사 생활 1년차에 도전한 서울 재임용이다. 첫 도전에는 실패했고, 결국 이듬해인 2년차에 다시 한 번 도전해 성공해내기는 했지만.
교사의 재임용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현직 교사가 다시 신규교사로 임용되는 것을 뜻한다. 보통은 현재 있는 곳에서 다른 시도 지역으로 근무지를 옮기고 싶을 때 사용하게 되는 최후의 카드이다. 최후인 이유는, 성공률이 그다지 높지 않아 애초에 도전하는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교원임용시험에 응시할 때 미리 지역을 정해서 원서를 접수한다. 시험 문제는 전국 공통이지만, 각 지역 지원자들의 성적 분포에 따라 내 점수가 인천에서는 합격이 될 수도, 부산에서는 불합격이 될 수도 있다. 대체로 서울과 경기 지역이 커트라인이 가장 높고 치열하며, 그중에서도 서울은 매년 재야의 고수들이 많아 합격하기 가장 어려운 지역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매년 서울만을 고집하는 수험생들이 많다. 아무래도 퇴근 후에 누릴 수 있는 인프라와 문화생활에서 오는 차이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사실 나 역시 경기도에 처음 지원할 때만 해도 뭐가 그렇게 다르겠나 생각했다. 서울에 사는 서울 시민이지만, 서울에 살았던 오랜 세월 동안에도 그렇게 외향적으로 밖을 돌아다니며 인프라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기에 낯선 지역인 경기도에서도 무리 없이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나는 발령받은 지역의 적은 인프라 자체에는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정작 나를 괴롭힌 것은 부족한 인프라보단, ‘인간관계적’으로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지역이 좁은 탓에 직장에서의 삶과 퇴근 후의 삶이 분리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답답함. 익명성이 없고, 교사가 아닌 시간의 내 사생활이 보장되지 못하는 느낌.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현재의 나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의 나를 정의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요소를 깨달은 시점이었다.
나는 '학생들'과 깊고 인간적인 관계를 쌓고 싶어 하는 성향인가.
답은 명확했다. '아니오.'
그것이 지금도 내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벌써 몇 년째,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어떻게든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하루하루 겨우 버티고 있으며, 학생들에게도 진심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내가 발령받은 지역은 경기도 남부 지역의 작은 신도시였다. 정확히 말하면 신도시와 농촌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곳이다. 인구는 10만에 육박하는데 동네의 전체 면적은 그리 넓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퇴근해도 길에 깔린 것이 학생들이고 학부모였다.
친한 동기 선생님들과 가볍게 한잔하러 가는 길이면 학생들을 열댓 명씩 줄줄이 만났다. 갈비를 뜯으며 살짝 취해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술을 마시고 있는데 한 학부모가 인사를 해왔다. 맛있는 회덮밥 집을 발견했는데 3월 초에 딱 한 번 보강을 들어갔던 반의 학생이 알은체를 했다. 알고 보니 그 학생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가게였다. 나는 그 학생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데, 그 학생은 나를 알았다.
그 학생들이, 그 학부모들이 잘못했다는 건 절대로 아니다. 또, 이러한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동기 선생님들도 아주 많았다. 길에서 우연히 학생들 만나면 어떻냐고? 반갑지 뭘 그래. 그렇게 하하 웃으며 대답하는 얼굴들에 대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틀렸다는 건 정말로 아니지만, 내향적인 나에게는 그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정말 고역이었다고.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크기는 모두 다른 거니까. 점점 퇴근 후에 집 밖으로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나가지 않는 것과 나가지 못하는 건 굉장히 다른 감각이었다. 내가 이곳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나를 괴롭혔던, 내가 재임용을 결심하게 된 첫 번째 이유이다. 아, 다시 서울로 가야겠다.
주말마다 본가에 올라가면 느끼는, 길을 걸어도 아무도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어느 평범한 저녁들. 그냥 최윤슬이라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 혹은 그저 잘 모르는 익명의 누군가로 바라봐주는 그런 순간들.
그런 하루하루를 매일 매일 살고 싶다. 교사로서의 나는 학교에서만으로 끝내고 싶다. 학교에서의 나와 퇴근 후의 내가 분리되었으면 좋겠다. 그냥 직장인으로서의 작은 소망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내 마음은 늘 ‘교사로서의 나‘는 어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여튼, 그땐 그 정도까지 파고들진 않았다. 그래도 그런 작은 순간과 고민들이 모여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만들어주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멈춰 있지 않은 것이다. 조금씩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충분히, 내일을 향해 내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