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너무 좋아해서 생긴 검은 그림자의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았던 때가 있었다. “사랑은 병(病)”이라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마음이 헝클어졌다. 이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찰스 스트릭랜드는 예술에 집착한 나머지 17년 동안 사랑하는 아내마저 미련 없이 버린 강렬한 인상의 주인공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 주인공의 모델이 다름 아닌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고갱이라고 알려졌다.
찰스 트릭랜드의 이기심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엇갈린다. 나에게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다. 적어도 비슷한 사랑을 하며 삶을 꾸려나가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위험한 말을 남겼을까? 천재 예술가라고 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변명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에게는 그림이 무기력한 일상을 버텨내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이런 마음가짐 때문에 그를 더욱 못된 사람으로 느끼게 했다.
사람마다 인생을 뒤흔드는 날이 올 때가 있다. 한순간 폭풍이 휘몰아치며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물방울의 작은 움직임이 바위에 구멍을 뚫을 때도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물방울과 같은 존재였다. 고갱 같은 천재의 삶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꿈을 이루며 살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살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현재형이었다.
이러한 열망, 마음의 끝에서 꿈을 꾸며 살고 싶은 영혼에 대해 에리히 프롬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되 자기 자신을 갖지 못한 자들”이라고 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은 자기 자신이며 조연은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라는 제목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바로 예술과 일상으로 비유된다. 이 둘의 차이는 먹고사는 본질에 있다. 예술은 먹고사는 문제를 의심한다. 반면에 일상은 먹고사는 문제를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예술은 먹고사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한다. 반면에 일상은 먹고사는 굴레에서 갇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책방아지트가 일터가 되면서 어느 때보다 예술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었다. 책방아지트에 있는 다양한 책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일상적인 삶을 버틸 여력이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몇 번의 시련으로 인해 삶이 믿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책방아지트에 빨간불이 켜지고 예술적인 삶이 무너지면서 무기력함이 나를 덮쳤다. 그럴 때면 어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에 스마트폰으로 숏품(short-form)을 보는 게 전부다.
그런데 살다 보니 사랑도 경계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예술보다 사랑을 먼저 선택한다. 예술은 혼자서 할 수 있어도 사랑은 서로가 해야만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다짐한다. 문제는 어느 순간 사랑마저도 일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랑의 구속이라고 할까? 사랑의 감정에 발목이 잡히거나 사랑에 길들여진 영혼으로 사는 것이 두려웠다.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아직 내가 예술에 목숨을 걸기 때문이다.
‘사랑은 병.’ 사랑과 병은 모순인 것 같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는 일이 비단 찰스 스트릭랜드 문제만은 아니었다. 나는 도저히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마음속에 묻어두며 감추었던 진실을 변호하는 것 같았다. 망가지고 부서진 채로 무의미하게 지속되는 사랑의 모순을 그럭저럭 버티며 사는 몸부림을 한사코 외면해오지 않았던가. 끔찍이 외로운 사랑, 어쩌면 나는 사랑의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다.
사랑의 희열이 과연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할까?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갈망했는지를 생각하면 사랑의 쓸쓸함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모자란 감정까지 쏟아내며 사랑을 하지 않았던가. 사랑의 고통을 알면서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비록 세상이 미워도 사랑마저 미워할 수 없으니까.
나는 이제 책방아지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책방아지트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책방은 나만의 비밀스러운 아지트이었다. 햇빛이 강렬하게 들어오는 시간이 되면 유리창을 블라인드로 가려야만 책이 바래지 않고 온전히 살 수 있다. 책을 위해서라면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100% 활용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상의 방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가령, 책방아지트에 화분이 몇 개 있는데 흙이 바짝 마를 정도가 될 때까지도 물을 주는 방법을 까먹는다. 벽에 거미줄은 기본이고, 고장난 형광등을 교체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다. 다시 말하면 일상을 사는 방법이 비효율적이라 까막눈이라는 핀잔을 듣는다.
한때는 누군가를 사랑했으나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단단한 믿음으로 되돌아왔다. 책방아지트에서 보내는 시간은 고독하면서도 낭만적이다. 비로소 고독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내가 이 세계에서 해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고갱의 마지막 작품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이다. 화가는 이 작품을 그리면서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위대한 작품을 남겨보다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나 역시 사랑은 병이라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말을 건네기 어려웠다. 이번 한 번을 끝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음으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말이 가슴에 간절히 머물렀다. 오늘도 나는 책방아지트에서 독서하고 글을 쓰며 다시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 책방아지트는 달(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