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아과아빠 Mar 18. 2024

아기 세탁기? 그거 뭔데

같이 쓰면 큰일 나나?

 아기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아내와 열띤 토론을 했던 주제가 있었어. 사실 토론이라기 보단 서로가 서로에게 이유가 되기 위한 대화였던 것 같아.


'오빠. 아기 세탁기라는 게 있대.'

'응? 아기 세탁기? 그건 뭐야?'

'아기빨래를 따로 돌리는 거야.'

'왜?'

'어른들 옷이랑 섞이면 좀 그렇다는데?'

'뭐가?'

'몰라. 그렇대.'

'아, 정말?'


 나는 비 아빠기도 했지만 의사이기도 해. 의사들이 오염과 멸균에 얼마나 예민한데, 그런 내가 듣기에 너무 이상한 말이었어. 빨래를 같이 돌리는 것도 아니고, 아기 빨래 따로 , 어른 빨래 따로 돌리는데 같은 세탁기로 한다고 그게 오염이 되고 좀 그렇다? 진짜 이해할 수가 없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아기세탁기는 필요가 없는 품목 같았지. 그렇게 우리는 그냥 분리세탁만 하기로 하고 아기세탁기는 준비 품목에서 지워버렸어.  이런 물품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 젖병소독기는 뭐, 그렇다 치자. 나도 그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아기 전용 세제, 아기 전용 도마, 칼, 샴푸, 바디워시, 면봉, 손수건.. 등등 정말 아기 한 명 들이는데 이렇게 많은 '전용' 제품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어. 이곳은 또 다른 세상이구나.


 준비를 하다 보니 결국 하나씩 하나씩 사모아서 우린 코코를 맞이할 수 있었어. 신생아 시기엔 잘 소독한 젖병, 쪽쪽이 등등 칼 같이 소독된 물품만을 사용했어. 하지만 그건 손을 빨기 전 까지였지. 코코는 손을 많이 빠는 아이였고, 열손가락을 돌아가며 아주 맛나게 계속 빨아대는 통에 코코 주변은 침으로 젖지 않은 것이 없었어.


'코코가 이렇게 손을 빠는데, 우리가 열심히 소독하면 뭐 하냐.'


우리는 소독에 대한 강박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어. 침대에 굴러다니던 쪽쪽이를 그냥 물린 적도 있었고, '흐린 눈'을 하고 침이 가득 묻은 손싸개를 그냥 두기도 했어. 코코가 다시 빨아 댈 것을 알면서도 말이야.


 하지만 손 빨기는 시작이었지. 코코는 곧 구강기를 맞이했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구강 점막의 감각으로 느끼기 시작했어. 간단한 말로, 코코는 온갖 것들에 입을 가져다 대고 빨고 핥고 물고 맛보고 느끼고, 여하튼 더러웠어.


 그리고 이유식이 그 절정이었지. 너무 잘 먹어줘서 고마웠지만 먹는 것인지 흘리는 것이지 모를 이유식 타임은 턱받이를 빨아대고 수저를 떨어뜨리고 다시 줍고 잠시 눈을 돌리기 위해 물려준 치발기를 떨어뜨리고 주워주고 다시 물기를 반복하며 이게 밥을 먹는 것인지 바닥에 있는 먼지를 먹는 것인지 모를  식사시간이 아직도 진행 중이야. 이유식에 간식까지 먹다 보니, 이유식기도 많이 나오고 숟가락도 계속 쌓이더라. 처음엔 직접 아기세제로 설거지를 하고 스팀소독기를 돌리고 하는 과정을 다 거쳤지만, 어느 순간 아내와 나는 '흐린 눈'을 하고 식기세척기에 이유식기와 숟가락을 돌리고 있어. 우리가 먹은 식기와 함께.


'트루스팀이 우리 손으로 하는 설거지 보다 훨씬 깨끗하게 해 줄 거야.'


 코코, 미안. 아빠는 위생에 엄청 예민한 아빠지만, 퇴근 후에  손소독제로 세수를 하고서야 너를 안아 드는 아빠지만, 너의 빨래와 식기는 대기업의 기술력에 맡겨볼게. 대신 아프면, 아빠가 있잖아?


 아빠랑 엄마가 설거지하고 빨래하는데 들이는 에너지 조금만 아껴서 더 많이 사랑해 주고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널 바라보고 더 많이 뽀해 주고 더 많이 놀아줄게.


 어차피, 너 좀만 더 크면, 길거리에서 이것저것 다 사 먹을 거잖아. 그렇지?


 그래, 소아과 아빠는 합리화의 달인이야.

이전 11화 '아빠'도 불러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