便宜坊烤鸭店(鲜鱼口店) in Beijing, 2024
(이번 편은 베이징 덕에 대한 기원이나, 베이징 덕이 중국 요리를 대표하게 된 과정을 정리한 것입니다. 실제 요리에 대한 내용은 2편을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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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역시 자금성입니다.
혹자는 자주색과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성이라 자금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서양 선교사들은 'Forbidden city', 그러니까 금지된 도시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했을 이 영문 명칭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금성이라는 명칭의 정확한 의미는 아닙니다.
자금성에서 '자' 는 하늘에 있다는 '자미궁', 즉 천제의 거처를 의미합니다. 천제는 북극성에 거처한다고 여겨졌는데, 북극성이 속한 별자리가 바로 자미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제의 아들인 황제가 사는 곳에도 천제의 집인 자미원의 이름을 따서 '자' 를 넣었습니다. 한편 '금'은 서양 선교사들이 생각한 바와 같이 금지한다는 의미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Forbidden city'는 절반만 맞는 이름인 셈이죠. 천제의 아들인 천자가 사는 곳이니 당연히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되었습니다.
이 자금성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 현재 가장 바깥쪽으로 위치하고 있는 문이 정양문입니다. 정양문은 황제가 앞서 살펴본 천단으로 제사를 지낼 때 드나들던 문이었습니다. 현재 자금성의 정문처럼 보이는 오문을 나와, 현대 중국의 상징이 된 천안문을 통과하면 나오는 천안문 광장. 이 광장을 쭉 가로질러 나가면 마지막에 나오는 문이 바로 정양문입니다. 정양문 밖은 '금지된' 구역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황궁인 자금성에 여러 가지 물건을 납품하는 상인들이 상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육조 거리와 비슷한 풍경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황실에 납품을 담당하는 점포가 들어서니, 이들에게 납품하기 위해 전국의 상인들이 이 정양문 앞 거리로 몰려왔습니다. 지금도 넓은 중국 땅을 하루만에 돌아다닐 수 없으니, 옛날에는 당연히 베이징까지 온 전국의 상인들은 이 곳에서 숙박도 하고, 식사도 해야 했겠죠. 그러니까 이들을 상대할 숙박업소나 식당들도 이 곳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오늘날 '전문대가' 라고 부르는 상권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 전문대가에 대해서는 다음에 조금 더 자세히 보기로 하고, 이렇게 형성된 전문대가에 유서 깊은 베이징 덕 식당이 빠질 수 없었겠죠. 베이징 덕은 수많은 중국 음식들 중 국가를 대표하는 수준의 특별한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중국어 회화 교재에도 이 베이징 덕이 등장하는데요, 베이징 덕이 등장할 때 항상 같이 등장하는 식당이 바로 치엔쥐더, '전취덕'입니다. 전취덕의 가장 큰 점포는 전문 바로 옆의 허핑먼, 화평문에 위치하고 있지만, 본점이라 할 수 있는 점포는 이 전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쉽게도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 전취덕의 오리를 맛볼 수 없었는데요, 진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 베이징 여행의 가장 큰 목적 중 하나가 이 현지의 베이징 덕을 먹어보는 것이었기 때문인데요, 대신 다른 두 곳의 식당에서 베이징 덕을 먹어볼 수 있었습니다. 베이징 덕의 원조라고 꼽히는 '편의방' 과, 현재 베이징에서 가장 맛있는 베이징 덕 식당이라고 꼽힌다는 '1949 Duck de Chine' 입니다. 두 곳의 식당 중, 편의방에 대해서 먼저 소개해 볼까 합니다.
다만, 편의방에 대해 소개하기 전에, 조금 내용이 길어지더라도 베이징 덕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왜 베이징 덕이 수 많은 중국의 진미들 중 국가를 대표하는 수준의 요리가 되었을까요? 중국 사람들은 정말 못 먹는 것이 없기로 유명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비집, 샥스핀도 있지만, 정말 귀한 것은 수백만 원까지 호가한다는 말린 전복 같은 해산물도 즐비합니다. 생각해 보면, 베이징 덕은 그 조리 과정이 복잡할 뿐 결국 집에서 기를 수 있는 오리에 불과하죠. 서태후가 베이징 덕을 즐겼기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서태후는 자신의 식탁에 똑같은 요리가 오르는 것을 싫어할 만큼 다양한 요리를 즐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리 요리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사치의 극을 달리던 서태후가 오리를 좋아해도 베이징 덕만 먹었을 리도 없죠. (서태후는 자신의 취향이 알려지면 독살의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심지어, 중국에 유명한 오리 요리가 베이징 덕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중국에서 유명한 오리 요리의 원조를 꼽자면 아마 '남경 오리' 일 것입니다. 오래된 고서들에 따르면, 남경, 오늘날의 난징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오리 요리를 즐겼다고 합니다. 명대쯤 되면 이미 '남경 오리' 는 난징의 명물 요리로 그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청나라 말까지도 이러한 명성이 지속되어, 난징의 오리라고 하면 전국에서 알아주는 요리였다고 합니다. 앞서 잠깐 언급한 서태후 또한 이 남경 오리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 남경 오리는 염장 오리인 '옌수이야', 소금이나 간장에 절여 말린 '반야' 등이 유명했는데, 서태후에게 헌상품으로 바쳐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서태후가 특별히 베이징 덕만을 즐겼다고 보기도 어려운 일이죠.
지금도 난징 사람들은 이 오리 요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합니다. 연회석에 오리가 없으면 연회가 아니라고 하고, '옌수이야' 등을 집에서도 즐겨 먹는다고 하는데요. 생각해 보면 식당에 가서 먹는 요리인 베이징 덕에 비해 남경의 오리가 사람들의 생활 속에 더욱 깊숙히 침투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베이징 덕 또한 이 남경 오리 요리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명나라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를 밀어내고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원래 수도였던 남경의 여러 문물이 올라왔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오리 요리라는 것이죠. 냉장고도 없던 옛날이니 아무리 소금에 절이고 말리더라도 요즘처럼 오리를 잡아 고기 형태로 북경까지 이송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차라리 오리를 산 채로 배에 실어 북경까지 보내는 방법이 더 안전하죠. 수나라 시절부터 대운하가 연결되어 있었으니까요. 이 때, 당연히 오리를 배에 풀어 기를 수 없으니 작은 우리 안에 넣고, 굶어죽지 않도록 먹이를 주게 됩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방법인데요. 푸아그라를 얻기 위해 거위를 억지로 살찌우는 방법과 비슷합니다. 우리 안에 갇힌 오리는 운동량이 없으니 사료만 받아 먹으며 살이 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올라온 오리는 지금 우리가 베이징 덕에 쓰는 오리처럼 통통하고 기름이 잘 오르게 되는데요, 이후 베이징의 오리를 잡을 때는 '전압' 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오리에게 강제로 사료를 먹였다고 합니다. 이 방법은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면 동물 학대지만, 청나라 시절부터 전해오는 방법으로 '수원식단보증' 이라는 청나라 요리책에도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남경에서 전래된 베이징 덕이 어떻게 원조의 명성을 넘어 중국을 대표하게 되었을까요? 이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특수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중국은 국가의 중대한 행사, 예를 들면 저우언라이와 키신저의 만남 같은 중요한 외교 회담의 만찬으로 바로 이 '베이징 덕'을 내놓습니다. 국가적인 만찬 요리이자 대표 요리로 '베이징 덕'을 선택한 것이죠. 2024년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도 이 베이징 덕이 만찬 요리로 올라왔는데요. 이러한 베이징 덕에 대한 중국 정부의 편애는 1958년,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초반부터 관찰됩니다. 1958년 간행된 '중국명채보' 그러니까 중국 명요리집에 따르면, 가장 첫머리에 베이징 카오야, 즉 베이징 덕이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베이징 덕의 대표 명점으로 '전취덕', '편의방'이 언급되어 있구요. 사실 이 책 자체가 정부의 입김 아래 편찬된 책이기 때문에, 이 시점부터 중국 정부가 베이징 덕을 특별한 요리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유명한 키신저와의 회담 외에도, 닉슨과 마오쩌둥의 회담 등 국가정상급 회담에는 어김없이 이 베이징 덕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베이징 덕이 중국 정부의 선택을 받은 요리였기 때문에, 중국을 대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정부가 베이징 덕을 선택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수도 베이징을 대표하는 요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울이 차지하는 위상 이상으로 베이징은 중국에서 특별한 도시입니다. 베이징 시민권의 가치가 백만 위안에 달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지요. 베이징의 대표 요리가 곧 중국의 대표 요리가 된 셈입니다. 사실 베이징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북쪽 지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샥스핀이나 제비집, 말린 해산물 등과 같은 진귀한 재료는 대부분 물산이 풍부한 남방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대대로 중국의 경제력은 남부 지역의 풍부한 물산에 기반하고 있었구요. 그러다 보니 사실 북경에는 그렇게 유명한 대표 요리가 많지 않았습니다. 수도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베이징 관광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베이징 대표 요리는 베이징 덕을 제외하면 일종의 양 불고기, 북경식 훠궈라 할 수 있는 솬양러우, 작장면 등입니다. 그러니 베이징 덕이 큰 경쟁 없이 베이징의 대표 요리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름에도 '베이징'이 들어가니까요.
'베이징 덕'이 중국 정부의 선택을 받은 '요리'라면, '전취덕'은 중국 정부의 선택을 받은 '식당'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빈 만찬때 베이징 덕이 나오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 오리를 요리한 식당이 바로 전취덕입니다. 1958년부터 명점으로 인정받던 전취덕과 편의방, 양대 식당 중 전취덕이 중국 정부의 선택을 받은 이유는 간단한데요, 편의방이 중국 국민당 편을 들었던 반면 전취덕은 공산당 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이 승리했으니 당연히 전취덕이 승기를 잡았고, 오늘날까지 베이징 덕의 대표 식당으로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취덕은 선전 증시에 상장도 되어 있으며, 연간 이용객이 2,000여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한편 국민당 편을 들었던 편의방은 한때 영업 중단까지 겪어야 했으며, 현재는 전취덕에 비해 아무래도 밀리는 인상을 주고는 있으나 베이징 토박이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역시 베이징에서 여러 개의 식당을 운영 중에 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로, 이 편의방이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중국 상무부의 후원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편의방은 전취덕과 함께 제 1차 중화 전통브랜드 선정에 포함되어 국가특급 식당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국가 행사에는 전취덕의 요리사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정부와의 관계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후 편의방의 '오리구이 기예(便宜坊焖炉烤鸭技艺)' 라는 이름으로 국가 무형문화재로도 등재되었다고 하니까요.
편의방과 전취덕, 두 식당은 정치 성향뿐 아니라 음식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베이딩 덕을 만드는 방식이 다른 것으로 유명한데요. 원조라고 일컬어지는 편의방의 방식은 바로 '민노' 라는 방식입니다. 베이징 덕은 결국 오리를 일종의 오븐에서 굽는 음식입니다. 오리를 구울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요, 이 민노는 오리를 구울 때 오리가 불에 직접 닿지 않는 방식입니다. 화로의 문을 닫고, 안쪽에서 열로 익히는 방법이죠. 베이징 관광청에 따르면 과거에는 수숫대로 불을 피워 화로의 온도를 올리고, 불꽃이 사그라든 후의 열기를 이용하여 오리를 굽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화로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에 안쪽에서 오리가 어떻게 익어가는지 직접 눈으로 보기 어려워 난이도가 있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는 수숫대 대신 전기로 온도를 올리지만, 화로를 닫고 불이 닿지 않도록 하여 익히는 방식은 과거와 동일합니다.
한편, '괘로' 는 전취덕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식당들이 사용하고 있는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화로에서 굽는 것은 비슷하지만 직화로 오리를 굽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직화 구이 방법은 청나라의 지배계층인 만주족의 전통 요리인 돼지 통구이와 조리 방법이 상당히 비슷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전취덕의 창업자가 청 황실의 궁정요리사를 영입하여 현재의 맛을 완성했다고도 하는데, 청 황실의 배경인 만주족의 대표 연회 메뉴가 돼지 통구이임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황실 요리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은 아니겠으나, 베이징 덕은 현대 중국 수립 시점에도 고급 요리로 인식되었고, 그러다 보니 문화대혁명 시기에 나름의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당시 홍위병들은 고급 음식점 등을 비난하며 보통 서민들이 먹을만한 음식을 만들 것을 강요했는데, 이 시기에 중국의 고급 전통 음식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베이징에서 이 홍위병들이 가장 먼저 들이닥친 음식점이 바로 전취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위병들은 전취덕이 '반혁명' 적인 식당이라며, 가게 이름을 '베이징카오야덴' 등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이것이 1966년경의 일입니다만, 저우언라이는 이후 1971년 키신저와의 회담때 다시 전취덕의 베이징 덕을 대접하는 등 문화대혁명 속에서도 전취덕은 그 지위를 유지하였습니다.
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지금부터는 과연 편의방의 베이징 덕이 어떤 맛이었는지 제가 경험한 이야기로 들어가 볼까 합니다. 사실 베이징 덕에 대해서는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이었는데요. 사실 우리나라에서 나름맛있다고 알려진 베이징 덕 레스토랑에서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맛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10만원을 우습게 넘어가는 것과 달리, 편의방의 베이징 덕은 6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가격이었기 때문에 한번 먹어보자는 생각으로 호기롭게 찾아갔습니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