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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이사

무언가 어디선가 단단히 잘못됐다

서울에서 뉴욕으로 갈 때 해외 이사를 처음 해봤습니다. 국내 이사라면 포장이사라고 해도 자질구레한 작은 건 간편한 단프라 박스 같은 데 담아서 보내잖아요. 해외로 이사할 때는 검역이라든가 하는 문제 때문에 모든 짐을 박스에 넣어서 밀봉 포장하게 돼 있습니다. 


덕분에 포장 전문가의 신기에 가까운 포장 기술도 구경했습니다. 소파같이 큰 가구를 어떻게 싸나 했는데 박스 재질의 큰 종이를 현장에서 재단해서 소파랑 똑같이 생긴 전용 박스를 뚝딱 만들어내더라고요.

한국에서 포장하는 짐

서울에서 이삿짐을 부치고 빈 집에서 며칠 살다가 뉴욕으로 갔습니다. 사정이야 어쨌든 돌도 안 된 갓난쟁이를 데리고 생활하다 가는 거라서 이삿짐으로 못 부치고 사용하다가 손으로 들고 날라야 하는 짐이 너무 많았어요. 여행용 캐리어 대짜로 9개를 들고 갔으니 말 다했네요.


뉴욕에서는 취사가 가능한 레지던스에 2주간 머물면서 새로 살 집도 알아보러 다니고 그랬습니다. 새 집을 결정하고 계약을 하고 들어가서는 필요한 집기를 급한 대로 구입하고, 그렇게 필수품 위주로 갖고 생활하면서 잊고 살다 보면 이삿짐 배가 도착합니다. 45일 정도 걸린 것 같네요.

미국에 도착한 짐(의 일부)가 복도를 점거했다

이삿짐을 쌀 때는 한국의 전문가 5명이 와서 작업을 했는데, 미국에서 풀 때는 2명밖에 안 왔어요. 원래 3명인데 1명은 주차 때문에 차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안 올라왔더라고요.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는 맨하탄의 주차말이에요.


둘이서 열심히 집 안에 박스를 실어 날랐지만, 이윽고 안방이 가득 차고, 작은방도 가득 차고, 부엌까지 차니까 짐을 둘 데가 없는 거예요. 거실을 완전히 채워버리면 짐을 풀 최소한의 자리도 안 남게 되거든요. 그래서 할 수없이 복도에서 테트리스를 시작했습니다.  

안방. 짐이 꽉 차서 짐을 풀 수 없군요!

 한 층에 8집이 사는 복도식 아파트였거든요. 박스를 벽에 딱 붙여서 키만큼 높게 쌓았는데도 자리가 좁아서 정말로 남의 집을 문짝만 남겨놓고 다 가려버렸어요. 모든 살림을 네모난 박스에 넣다 보니 어느 정도는 과대포장이 불가피하지만 박스가 정말 많았습니다. 분실 방지용 일련번호를 매기는데 147번까지 갔더라고요. 박스 147개.


그런데 일하는 아저씨 둘이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작업을 하는데 손이 너무 느린 겁니다. 한 명이 박스를 나르면 한 명은 안에서 푸는 식으로 착착 분업이 돼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그럼 둘이 같이해서 빠릿빠릿하냐면 그것도 아니고 느적~느적~ 합니다. 침대 조립에 한세월~ 소파 조립에 한세월~ 하는 식이에요. 모듈 조립이라 혼자 해도 금방 하는 건데 말이에요.

거실. 짐이 꽉 차서 짐을 풀 수 없군요!

저는 마음이 급하죠. 벌써 오후 3시를 넘기고 있는데 이 많은 박스를 어떻게 푸느냐 말이에요. 분명 퇴근 시간도 있을 테니 밤늦게까지 붙잡아둘 수는 없을 텐데 말이죠.


결국 특단의 조치로 팁을 방출했습니다. 팁을 일당만큼 줬으니까 많이 준 셈이지요. 딴에는 곧 해가 지니까 열심히 일하자는 의미로 준 건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괜한 짓이었습니다. 아저씨들은 팁을 받고 10분 정도 더 일하고 갔습니다. 네 갔어요. 퇴근했습니다. 이제 안 볼 것처럼 인사를 하면서 집을 나서길래 물어보니 원래 '큰 가구'만 조립해 주고 끝이랍니다. 아니, 여보시오? 예? 그럼 방금 잡수신 팁은요? 예?

작은방. 짐이 꽉 차서 짐을 풀 수 없군요!

결국 그렇게 됐습니다. 인부는 제 갈 길로 갔고. 저는 박스 147개와 함께 남겨졌습니다. 아니 박스 자체는 140개 정도 되겠네요. 침대랑 소파랑 몇 개는 뜯어서 조립하고 갔으니.


이제부터 당분간 직업은 무보수 박스 해체업입니다. 처음 일주일은 매일 5개 넘게 풀었어요. 그다음 일주일은 하루에 3개, 그다음 일주일은 하루에 1개. 그런 겁니다. 박스를 풀면 풀수록 나중에는 쓸데없는 게 나와요. 그야 꼭 필요한 것 먼저 푸니까 당연하겠죠. 


문제는 쓸데없는 잡동사니 박스가 걸리면 이걸 어디 정리하기도 곤란하고 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진도가 콱 막혀버린다는 겁니다. 박스를 다 풀고 정리까지 끝난 건 이삿날부터 100일 정도 지나고 나서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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