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쪄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집에서 애들이랑만 지내고 큰 움직임이 없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살이 찔 수밖에 없죠. 음식도 하나같이 짜거나 달거나 하니까요. 몸도 좀 부대끼고 해서 운동 루트를 짰습니다.
일단 해가 떠 있을 때는 돌쟁이였던 둘째를 돌봐야 하니 절대 불가능했고요. 밤에 애들 재우고 슬쩍 나가서 단지를 한 바퀴 뛰고 오는 거였습니다.
이렇게 평범하게 한 바퀴 돌면 2km 나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아파트 단지는 맨하탄 중심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와 동쪽 강변에 붙은 스타이브센트타운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처음 지어지기로는 2차 대전 참전 용사 보훈 아파트였어요. 그러니까 지은 지 80년 가까이 돼가는 거죠.
그걸 시간이 지나면서 부동산 회사가 매입해 일반인 대상으로 렌트를 했던 건데요. 단지가 아주 컸습니다. 단지 안에 테니스코트 3면이 들어가는 넓이의 플레이그라운드가 9개 있으니 말 다 했죠. 하나는 잔디밭, 하나는 축구장, 하나는 어린이 놀이터, 하나는 테니스코트 이런 식으로 용도가 나뉘어 있었습니다.
9개 운동장 중 가장 자주 다닌 인조잔디 마당
높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단지 한가운데에는 축구장이 쏙 들어가는 거대한 천연잔디 공원이 있습니다. 날이 좋을 때는 영화 트럭이 와서 상영회도 하고 공연 같은 것도 종종 하고 그랬거든요.
이 사진 안에 다람쥐 200마리 정도 있겠네요
제가 짠 운동 루트는 일단 아파트 단지 담장 바깥으로 크게 한 바퀴 돕니다. 그럼 정확하게 2km 나오거든요. 그다음 단지 안쪽으로 한 블록 들어와서 단지 내 산책로를 이용해서 또 한 바퀴 돕니다. 그럼 총거리는 4km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 두 번째 바퀴에 계단이 있어서 오르기 100개, 내리기 100개가 포함됩니다. 들리시죠? 살 빠지는 소리. 아닌가 무릎 박살 나는 소린가.
죽음의 2바퀴. 계단 100개 오르내리기
그리고 마무리로 단지 안쪽 산책로를 이용해서 구불구불하게 한 바퀴 돌고, 이어서 중앙 잔디공원까지 한 바퀴 돌면 정확하게 6km 완성입니다. 저 지도에서 U 자 모양으로 생긴 구역이 계단으로 30개 정도 높은 지대예요. 달리다가 계단 올라가서 좀 달리고 다시 내려와서 달리고를 반복하는 거죠.
지금 구글 지도로 루트를 다시 그려보고 있는데 '정말 이걸 뛰었나' 싶네요. 역시 젊었을 때라.
운동을 끝내면 달리기 앱에 멋진 꽃이 한 송이 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밤 11시만 되면 운동을 하러 나갔습니다. 아마존에서 블루투스 mp3플레이어 작은 거 하나 사고요. 아무래도 휴대폰은 들고뛰기가 어렵더라고요. 막판에는 너무 힘들어서 손에 든 건 그냥 다 버리고 싶어지거든요. 귀에 무선 이어폰 하나 꼽고 뛰는 겁니다.
지났으니까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뉴욕에서 아시안이 밤 11시에 조깅이라니 무슨 일이 나도 이상할 게 없던 상황이죠. 달리는 코스 중에 제일 위험한 구간은 14th Street 구역이었는데요. (지도에서 가장 아래 긴 직선 구간) 그 아래쪽이 이스트빌리지라고 해서 치안이 좀 안 좋은 곳에 속합니다. 번화가랑도 거리가 좀 있고요.
한 번은 그 길을 뛰고 있는데 특정 지점에만 도착하면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겁니다. 처음에는 홈리스 지린내인가 했는데 그런 불쾌한 냄새는 아니고요. 이상한 냄새예요. 표현할 방법이 이상하다는 것밖에 없네요. 살면서 맡아본 냄새 중에 묘사할 만한 비슷한 냄새가 없어요.
약간 울렁거리기도 하고 독하기도 하고 그런 냄새인데 나중에 보니까 흑인들이 모여서 대마를 피우고 있던 거였습니다. 워낙 밤이라 공터 계단에 모여서 피우고 있는데 안 보였어요. 순찰차가 지나가기도 하는데 뉴욕에서 대마는 단속 대상이 아닌지 숨거나 하지도 않더라고요.
물론 그 사람들이 해코지를 한 건 아니고 무슨 말을 건 적도 없습니다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거든요. 그 뒤로는 단지 안쪽으로만 도는 것으로 코스를 바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