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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마술사

by 작은영웅 Feb 15. 2025

어느 날 TV 속에 들어갈 것처럼 몰입해 있는 남편에게 딸아이가 물었다.

"아빠, 엄마가 저 사람보다도 예뻐?"

"물론이지.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 아빠는 엄마가 예뻐서 결혼한 거야. "


늦은 오후의 산행, 내려오는 길에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손을 잡고 내려오는 데도 야맹증 때문에 자꾸 발을 헛디디는 나를 업고 내려오는 남편. 등에 업힌 채 미안한 마음에 묻는다.

"엄청 무겁지?"

"아니, 깃털처럼 가벼워."


3일쯤 머리를 안 감고 버티던 날, 내 머리에 코를 박고 잠든 남편에게 물었다.

"머리에서 쉰내 나지?"

"아니, 자기한테는 늘 좋은 냄새가 나. 사랑스러운 냄새."


내가 30년째 같이 살고 있는 남자는 언어의 마술사다. 집안일이라고는 쓰레기 분리수거 딱 하나만 하는 그는 심지어 화장실 청소도 깃털같이 연약한(?) 나에게 일임한다. 그러고 나서 모든 미안함을 끝없는 덕담으로 상쇄한다.

"이 작고 예쁜 손으로 못하는 게 없네."

"이정도면 화장실에서 자도 되겠다. 자긴 마술사 같아." 등등.

어쨌든 나는 이 말들에 속아 화장실뿐만 아니라 집안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요리도 하면서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


자녀 양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자랄 때, 교육 문제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나에게 있었다. 아이들이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플 때에도 늘 모든 해결은 나의 몫이었다. 모든 전권을 일임하고, 잘한 것은 칭찬하고, 못한 것은 탓하지 않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편했지만 주변에 가족 양육에 적극적인 친구들 남편을 볼 때는 못내 서운했었다.


직장과 집을 오가며 육아와 집안일에 지칠 때면 나는 여행을 떠나곤 했다. 30일간 유럽 여행도 다녀왔다. 그럴 때도 그는 흔쾌히 다녀오라고 했다. 한 번도 나의 앞길을 잡지 않았고 위험한 국제 상황에 주저할 때도 이럴 때가 여행 적기라면서 등을 떠밀었다. 다른 남편들은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한다던데 하면서 의아할 때도 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이런 나의 일탈 때에도 집안일은 나의 몫이었다. 아이들은 친정집에 맡기고 가야 했고, 집안이 쓰레기통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긴 여행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서 돌아오면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진 방 가운데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안 보는 동안 너무 예뻐져서 돌아왔네."


여기쯤 읽으면 내가 엄청 예쁜 여자라고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152m 단신에 작고 귀여운(?) 여자다. 남편이 나에게 예쁘다고 떠들어대면 우리 딸들은 약간 어이없어한다. 나를 빼닮은 둘째는 엄마보다 아빠를 닮았어야 한다고 불평이니까 외모는 나보다 남편이 조금 나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감언이설 때문에 나는 조금은 외모에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남편 외에 아무도 나한테 예쁘다는 말은 안 하는 사실에 약간은 분노하면서.


회복탄력성이 높고 낙천적이며 매사에 긍정적인 그와는 달리 나는 늘 걱정을 안고 산다. 집안일이든 애들 일이든. 남편이 걱정을 안 하니 나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이다. 이렇게 몸도 마음도 남편 대신 열일하는 나는 2살이나 나이가 어린데도 더 나이 들어 보인다. 미간에 인상을 쓰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남편의 놀라운 회복탄력성이 부럽다가도 가끔은 화가 나기도 한다. 대책 없는 낙천성이 문제 해결력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걱정만 많을 뿐이지 적극적인 해결 의지는 없다. 어차피 가만있을 거면 마음이라도 편한 게 상책인데 괜히 마음만 졸이면서 얼굴에 주름만 늘인다.


일부러 남편 카드를 벅벅 긁어 쇼핑과 맛점에 흥청망청 한 날도

"카드 분실한 줄 알았지. 자기가 썼으면 된 거지."

명절날 친정 부모님께 드리는 봉투가 얇으면

"더 좀 드리지 그래. 이제 얼마나 사신다고."

이제 다 커서 분가한 딸들에게

"너희들이 지금 잘 나간다면 그건 다 엄마가 애쓴 덕분이야."

친구들과 술자리에 늦어 오밤중에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면

"당연히 가야지.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운전뿐인데."


매일 아침 일찍 성실하게 출근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기로 몸을 관리하고, 술, 담배, 커피와 같은 기호 식품은 입에도 안 대고, 매사에 긍정적인 남편은 아주 오래 살 것 같다. 나도 그 곁에 오래 살고 싶마음이 드는 건 뭐지?

남편의 마술에 걸려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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