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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로 보는 세상

by 소소산

처음 안경을 썼을 때의 시력은 0.2였다. 맨 뒤에서 칠판 글씨가 안 보인다는 이유로 쓰게 된 안경. 칠판 글씨를 보기 위해 1.0으로 맞춘 안경을 쓰기 시작한 뒤로 15년. 10년 넘게 안경이라는 목발에 의지한 내 눈은 발 밑조차 분간할 수 없는 고도근시가 되었다. 안경을 쓰지 않고는 계단의 높낮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라식 퇴행으로 다시 0.1로 보는 세상은, 컴퓨터 작업만 아니라면 불편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시력이다. 가장 편한 거리는 30cm의 책 읽는 거리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안경 없이도 전혀 문제가 없다. 불편을 느꼈던 PC 60cm의 거리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결국 모든 일은 시간이 답인가...)


시행착오를 거쳐 맞추었던 안경은 결국 쓰지 않았다. 안경에 대한 거부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시력에 관한 정보가 쌓일수록, 고도근시가 된 지금 내 눈의 원인은 안경이라는 원흉 때문이라고 더욱 확신하게 됐으니까. 물론 썼다 벗었다 하며 필요할 때만 쓰는 정도로는 고도근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지만.


비문증과 광시증으로 고생하면서 생각했다. 시력회복까지는 잘 되지 않더라도 비문증에서 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지금도 시력회복의 꿈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0.1로 보는 세상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비문증에 비하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불편이니까. 그래도 둘 다 포기하지 않을 셈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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