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짝눈 때문인지, 시력 저하 때문인지, 분명한 건 핀홀 안경을 써야만 TV 화면이 깨끗하게 보였기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 3-4만 원을 주고 구입한 구멍 난 안경. 수십 개의 구멍이 뚫린 검은 안경을 쓰고 보면, 보이지 않던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망막에 도달하는 빛의 양을 줄여 빛 번짐을 줄여주기 때문이란다.
낮에 잘 보이지 않아 피곤했던 눈알도, 핀홀 안경을 한두 시간 쓰고 있으면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와, 잘 보인다!' 하고 안구에 붙은 근육들이 움직이는 느낌이랄까. 선글라스도 아닌데 구멍 뚫린 까만 안경이라니, 남 보기엔 이상한 모양이지만 나에겐 매일 사용하는 매우 유용한 아이템이었다.
게다가 안경이 주는 거부감도 없었다. 몇 년은 족히 썼을 것이다. 그러나 시력회복 운동을 시작하면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안 보이는 글씨를 보려고 노력해야, 시력이 좋아질 수 있다는 이론을 접한 후에.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저 또렷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익숙해진 것인지, 정말 조금은 시력이 좋아져서 불편함이 줄어든 것인지는 잘 모른다. 진실이 전자일까 봐,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이제는 서랍 속에 고이 잠들어 있는 핀홀 안경. 물건에 좀처럼 애착을 갖지 않는 편이지만, 핀홀 안경만큼은 몇 안 되는 소중한 물건으로 꼽아도 될 듯하다. 함께 했던 시간과 매일 밤 내 눈이 되어주었던 역할을 감안한다면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그 긴 시간 동안 핀홀 안경은 제 역할을 다 해주었다. 겉모습은 좀 그랬어도, 우스꽝스럽진 않았다. 쓰지 않을 물건은 재빨리 치워버리는 성미지만, 핀홀 안경만큼은 당분간 지니고 있을 셈이다. 다시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땐 그랬지 하고 옛날을 추억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