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하지 못했다. 수년 째, 일명 뽁뽁이로 뒤덮인 내 방 창문을 통해서는 창밖을 볼 수 없었다. 그저 온기가 빠지면 안 되고, 더위가 들어오면 안 되는 창문의 기능만이 중요했다. 창을 통해서 '창밖을 보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당연히 두 쪽 창문 전체를 뒤덮어 버리고도 답답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나 보다.
시력을 위해서는 자주 멀리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창에 붙어 있던 비닐을 벗겨냈다. 긴 세월 창과 하나 된 뽁뽁이는 물로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본드처럼 진한 흔적을 남겼다. 창문에 눌어붙은 비닐과 한참을 씨름한 후에야, 비로소 다시 깨끗한 창을 되찾았다. 이제는 종종 책상 의자에 앉아 창밖의 구름이나 나무를 바라본다.
아침에는 안구운동기를 들고 창밖을 보고, 저녁에는 명상을 하며 창밖을 본다. 양치질을 할 때도 창가로 가서 몇 개의 간판을 훑어본다. 타깃은 보일락 말락 아슬아슬한 크기의 글씨들이다. '오늘은 날씨가 맑구나, 미세먼지가 심하군, 바람이 많이 부네.' 하는 생각을 하면서, 같지만 다른 광경을 매일 감상한다.
눈부시게 밝은 아침, 멋지게 노을 진 저녁, 날아가는 이름 모를 몇 마리 새, 자꾸만 올려다보고 싶은 맑은 달까지, 집안에서 그동안 놓치고 있던 예쁜 것들을 더 자주 보게 됐다. 이게 다 시력이 좋아질 수 있다고 믿고, 의식해서 창밖을 보기 시작한 덕분이다. 나는 오늘도, 창밖을 내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