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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Mar 17. 2024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기술이다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살다 보면 그렇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도 나름 쌓아온 빅데이터에 따르면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시간이 지나면 또 지나간다.



2024.3.11. 출근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기 초에 담임과 수업을 못하는 게 양심에 찔렸다. 일부러도 아닌데 왜 스스로 양심을 찌르는지.


3월은 제일 중요한 시기이다. 그만큼 해야 할 것이 많고 신경 쓸 것도 많다.


스스로가 필수불가결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다. 당연히 대체할 더 훌륭한 인력은 있다.


다만 그냥 스스로 욕심이다…

책임감이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교무실에 일찍 도착했다. 낑낑대며 유리문을 열었다. 이 문이 이렇게도 무거웠나.


교감선생님, 부장님과 같은 부서 선생님들의 관심이 쏟아졌다.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지만 목발 짚은 내 모습은 그들 눈에 별거였기에, 척하기도 힘들었다.


하루 결석했다고 쌓인 메신저를 읽으며 업무를 정리했다.


파일들을 열어 확인하고 인쇄 버튼을 누르는 순간,

오늘 하루가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프린터기까지 가서 인쇄물들을 손에 쥐고 올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겠구나.

현실을 자각했고 마음은 불안해졌다.




-아침 조회-


다행히 학교 안에 엘리베이터가 있다. 평소에는 타고 다니지 않았던 엘리베이터인데 지금은 생명의 동아줄이다.


조회시간에 목발을 짚고 어깆어깆 들어갔다. 어색한 목발 소리에 아이들은 당황한 듯하다. 목발 연습을 좀 더 해올 걸 후회된다.


어쩌다가 다쳤냐는 아이들의 말들과 걱정스러운 눈빛이 쏟아진다.


이에 나는 다리 하나 따위 없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천하무적 교사 콘셉트로 대응했다.


잘 먹혔을지는 모르겠다.




-교과 수업-


올해 비어있는 미술교과실에서 수업하기로 했다. 중국어 시간인데 아이들은 미술 교과실로 내려왔다. 갑자기 이동 수업이라 왔다 갔다 귀찮을 텐데, 내색 안 하고 지각 한번 없이 내려와 주는 우리 착한 아이들이다.



처음 노트북을 화면에 연결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노트북과 TV연결선이 없었다. 왔다 갔다 뛰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 너무 답답했다.



그 순간 미술 선생님이 오셨다. 수업하는 반 학생들의 담임이기도 하고 미술교과실을 쓴다고 해서 내려오셨다고 한다.


나의 안타까운 상황을 즉시 파악하시고, 직접 정보부에 가서 TV선을 가지고 와 연결해 주셨다. 생명의 은인이다.


어찌어찌 오늘 하루의 수업이 끝났다.




동료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아픈 날 대신해 이것저것 도와주려고 하는 동료 선생님들과 학생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도.


목발을 짚은 상태로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물건하나 드느라 낑낑 대는 것도.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쉴만하면 불어오고, 잔잔해졌다 높아지는 파도 같았다.





<아주 세속적인 지혜> 중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기술이다.’라고 했다.


어떤 일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 거친 파도처럼 걷잡을 수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한다.


사는 게 어떻게 늘 해만 뜰까. 바람도 불고 비도 오겠지. 그럴 때는 비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다.



이 소란스러움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대로 내버려 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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