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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하지 않는 남자(2)

by 여름나무

패티가 식었다.

남자는 두어 시간 전쯤 강변역 근처 노점에서 콜라와 불고기버거를 샀다.

늘어진 점퍼 주머니에 불룩하게 콜라와 버거를 넣고 걷는다. 한참을 걸었더니 종아리 근육이 뭉치고 당긴다. 한강이다. 빛바랜 벤치에 퍼지듯 앉아 콜라캔을 땄다. 찬기운이 가신지 오래된 밍밍한 맛이다.


남자는 작년 5월 위암 수술을 받았다.

아무리 1기 암이라도 예상 못했던 진단에 기막히고 겁이 났지만, 수술 후 잘 회복되었다.


보호자 서명할 때만 잠깐 왔다 갔던 아내가 마취에서 깨어나 진통과 사투를 벌이는 남자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 암 수술받고 회복할 때 잘해주는 전문 요양병원 있다는데 거기로 들어가는 건 어때?"

"집에 와봤자 난 바쁘고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고."

딸아이는 작년 이맘때 필리핀으로 관광 같은 유학을 떠났다. 누구의 병문안도 바라진 않았지만, 가끔 소란스러운 옆 침상의 오늘내일하시는 말기암 환자가 부럽기까지 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남자가 안쓰러웠는지 같은 방의 환자 보호자들은 반찬을 나눠주며 한 마디씩 던진다.

"부인은 없쑤?"

"혼잔가?"

그렇게 2주쯤 버티고 남자는 드디어 퇴원수속을 밟았다.


남자의 퇴원길.

풀린 다리, 움켜잡은 배, 맥 빠진 눈빛...

재작년 봄에 3천만 원 떼어먹고 도망간 대학동창이 남자의 앞을 휙 지나갔다. 아닌가? 하지만 불러 세울 힘조차 없는 남자는 온 힘을 끌어모아 퀭해진 눈으로 독기만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몇 년 전 들어놨던 암보험에서 3천만 원이 나온다. 시쳇말로 퉁이다. 떼인 돈과 보험금이 같은 액수라니.


힘겹게 택시에 올라탔다.

"상도동 현대아파트요"

더 이상 말 할 기운도 없다.

힘겹게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선 남자는 놀랍지도 않은, 익숙하기까지 한 광경에 헛웃음이 나왔다. 거실과 식탁에 널브러진 빈 맥주캔, 먹다 남은 굳어버린 양념치킨 몇 조각, 봉지째 뜯어놓고 먹었던 과자 부스러기들...

사발면의 국물 냄새와 단내만이 남은 시든 과일 몇 조각이 어젯밤 유흥의 뜨거움을 말해주고 있었다. 파티의 잔해들을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간 남자는 핸드폰을 꺼냈다.

"본죽이죠? 야채죽 두 개 부탁합니다. 현대아파트 103동 508호요"

남자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른하다. 어느새 잠이 든 남자는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한 벨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이 반쯤 떠진다. '아! 본죽"

식탁에 앉았다.

처음 집에 들어올 때 느끼지 못했던 탄내가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인덕션에 올라가 있는 냄비가 눈에 들어왔다.

뚜껑을 열어보니 밥을 하려다 태운 건지 죽을 쑤다 태운 건지 물을 잔뜩 부어놓은 상태다.

남자는 한심하다는 듯 소리 나게 뚜껑을 닫아버렸다. 야채죽을 먹고 안방에 들어온 남자는 다시 잠이 들었다.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모른척하고 싶었지만 찌뿌드 한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왜 깼어 더 자지!" 아내는 돌아보지도 않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청소기를 돌리고 있다.

"죽 끓여놨어."

'설마 아까 그 타버린 냄비?'

남자는 기가 막혀서 아무 말 없이 물을 마셨다.


도우미가 오전에 네 시간씩 집안일을 한다. 안타깝게도 청소만 잘하는 도우미다.


남자는 고민이 많았다.

질병 휴가가 끝나가고 있었다.

작년에 승진에서 또 누락되면서 다시 만년 과장으로 눌러앉게 되었다.

진즉 그만두고 싶었지만, 아내의 눈치도 보이고 40대 후반에 뭘 해야 하나 막막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헬스를 하고 온 아내는 퇴근하자마자 냉동실에 넣어뒀던 맥주를 꺼내왔다.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해졌다. 아내는 살얼음이 잔뜩 만들어진 맥주를 목구멍으로 벌컥벌컥 쏟아부었다. 슬러시 맥주는 아내의 식도를 얼려버렸고, 앙상해진 남자의 마음골에도 숨통을 트게 해주는 듯했다.

"와사삭 와사삭" 아내는 아무렇지 않게 감자칩을 먹으며 "오빠! 회사 그만두는 거 어때?" 남자는 속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만년 과장으로 눈치 보고 회사 다니느니, 오빠가 살림해라. 도우미보다 오빠 반찬이 맛있더라!"

"오빠! 나 이번에 부장 승진했어."


아침부터 덥다.

아내는 출근했다. 남자는 저녁에 먹을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외출을 준비한다.

매주 월요일, 영화를 보고 서점에 들러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리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쯤 사 오는 게 남자의 유일한 취미다.


남자는 몇 년 전부터 아내와의 이혼을 종종 생각했었다.

괜한 자격지심도 한몫 거들긴 했지만, 살림은 전혀 하지 않고, 시댁식구를 무시하는 태도도 두 사람의 관계를 냉랭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요즘, 남자는 퇴근하는 아내를 기다리며 찌개를 끓이는 싫지 않다.


오늘 마트에 다녀온 남자는 가계부를 적으며 한마디 한다.

"물가가 너무 비싸!"

아내의 답은 한결같다.

"아껴 써!"

한 달 생활비 250만 원.

개인 용돈 50만 원.

매달 25일이면 통장으로 300만 원을 정확히 꽂아주는 아내가 연애할 때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다.


벤치 아래로 떨어진 불고기버거의 달달한 양념이 묻은 양상추에 개미들이 가득하다. 반쯤 남은 콜라도 부어주었다. 색색의 노을은 한강과 남자를 덮어버렸다.

노을에 취한 남자는 한강을 따라 걷는다.

남자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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