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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랜턴 Nov 30. 2024

치러야 할 내 인생의 값

프라도 미술관 무료관람을 하고 나서

마드리드 공항에서 시벨레스광장(Cibeles Square) 근처에 있는 에어비앤비로 가기 위해 5유로(왕복)를 주고 공항버스를 탔다.


4시쯤 숙소 등록을 마치고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서둘러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으로 향한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매주 일요일 오후 5시부터 7시까지는 상설 전시관 관람이 무료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이며, 8천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마지막 일정이 피카소 뮤지엄이었고, 같은 날 이어지는 마드리드의 첫 일정도 프라도 미술관이니 하루에 미술관 여행을 두 군데나 하는 셈이다.


여유 있게 출발한다고 생각했는데 도착해 보니 무료관람객의 긴 행렬은 이미 커다란 미술관을 한 바퀴 감싸고 있다. 와~ 공짜 좋아하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구나!


줄을 섰다고 다 입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원수 제한으로 그날 입장이 내 앞에서 끊길 수도 있다. 무료관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1시간 전에는 줄에 서서 기다려야 한다. 모든 대기줄을 볼 때마다 매번 갖는 질문이긴 한데, 그럼 맨 앞에 서있는 사람은 도대체 몇 시간 전부터 기다린 걸까?


미술관 관람료는 15유로였다. 작품 수와 규모에 비해서 절대 비싼 가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짜의 매력은 동서양 다른 민족들을 모두 하나로 만드는가 보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뮤지엄은 매주 목요일 오후 6시부터 9시 30분까지 무료이며 규모가 크지 않아서 그 시간 안에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반면, 프라도 미술관은 전시실도 많고 작품수도 너무 많아 2시간 동안 모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차라리 입장료를 지불하고 하루 일정으로 느긋하게 감상하는 편이 좋았을 뻔 했다.


이것을 그때에도 알았더라면.


나의 선택은 어리석게도 피카소 뮤지엄은 유료관람으로 하여 본전을 생각나게 했고, 프라도 미술관은 무료관람을 택하여 제대로 본 그림 하나 없이 3시간을 낭비한 꼴이 되었다. 단지 세계 각국에서 온 지구인들과 함께 유명 미술관 무료관람의 줄에 서있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내 선택과 상관없이 태어난 내 인생의 값은 얼마일까? 태어난 김에 산다는 말은 언뜻 인생이 공짜인 듯 들리게도 하지만, 그 안에는 대가를 치르겠다는 마음비움의 자세가 들어있다.


많은 인파에 섞여 쫓기듯이 명화를 휙휙 감상하고 나니 어떤 작품을 봤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작품이라도 제대로 볼 걸.


시간 안에 다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사진 찍을 겨를도 없이 후딱후딱 전시실을 훑고 나왔다. 다음에 오면 반드시 관람료를 지불하고 천천히 꼭 한번 다시 보리라 마음먹지만 언제 다시 올 지는 예정에 없다.


긴 시간 영으로 대기하다가 생명으로 태어난 것도, 긴 대기줄에 서서 기다리다가 드디어 입장하는 것도 공들여 얻어낸 기회인데 명확하지 않은 흐름에 섞여 휙휙 지나칠 일은 아니다. 시간 안에 뭔가를 해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쫓기듯 살아낼 일도 아닌 것 같다. 나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오직 지금 뿐이다.


마드리드 시내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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