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랜턴 Dec 03. 2024

열심히 말고 즐겁게 살기로 한다.

에필로그. 여행 후 달라진 것들

마드리드 한인 숙소에서 같은 방에 묵었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자그마한 몸집의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혼자 여행 중이었으며, 일정의 중간쯤에 있다고 했다.


내일이면 스페인을 떠나는 날,

아직 몇 회가 남아있는 교통패스를 그녀에게 쓰라며 건네주었다. 그녀가 나의 일정을 묻는다. 나에게는 세고비아 당일관광이 마지막 일정으로 남아있었다. 여행정보를 나누는 짧은 대화였지만 그녀의 말투와 사용하는 단어, 몸짓과 표정에서 다부진 성격과 강인함이 느껴졌다. 혼자 여행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혼자 하는 배낭여행을 일찍이 20대에 했었더라면, 나도 애초에 자신감 하나는 갖고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고비아 마을 주민을 위한 수로. 외계인이 만든 것처럼 규모가 웅장하고 거대하다.


세고비아는 한국의 기타 브랜드인 줄로만 알았는데, 스페인에 세고비아라는 지명이 있고, 그곳의 알카자르(성)는 디즈니성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만들었다는 거대한 수로는 마치 우주인이 지구에 날아와 세워놓은 듯 그 엄청난 크기가 신비롭기까지 했다. 엉성해 보이지만 오랜 세월과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


그와 같은 단단함을 쌓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하는 걸까?


알카자르를 배경으로 잠시 디즈니성의 명랑 공주가 되어 사진을 찍고, 점심으로 꽤 괜찮은 메뉴 델 디아를 먹을 수 있는 행운까지 누렸으니 여행 마지막날을 잘 마무리한 셈이 되었다.


혼자만의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난생처음 하는 도전에 용기를 낸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며 사진 한 장 찍어준다. 여행을 시작할 때의 나와 끝내고 돌아가는 나는 많이 달라 보인다.




공항에 마중 나온 남편이 꽃다발을 건네며 나를 반긴다. 2주 만에 보는 남편의 얼굴은 화려한 꽃송이들 사이에서 어딘가 위축되고 불안해 보였다. 차에 올라 운전대를 잡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까지 한다. 남편은 지금 우리의 관계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결혼 후 처음으로 심각하게 이혼요구를 한 적이 있다. 결혼한 지 32년이 지나간 때였고, 스페인으로 떠나기 8개월 전이었다. 내가 바라던 결혼생활은 독립된 두 성인이 배우자로서 서로 아끼고 존중하며 함께 하는 삶이었다. 남편을 존중하고 아끼면 남편도 나를 그렇게 대할 거라 생각했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었을까? 나는 배우자라기보다는 남편의 응석받이가 되어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위해 존재하는 쓸모 있는 물품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래도,

비록 물건이었어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내게 보였다면 여기서 끝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을 결심하고 남편에게 알렸지만, 남편에게 이혼은 산 채로 땅에 묻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결국, 그는 내가 원하는 점들을 들어주기로 하고 이혼집행유예 1년을 택했다.


공허함과 막막함으로 무기력하게 지내던 내가 혼자 여행하겠다고 했을 때 남편은 말리지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었다. 내가 떠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불안을 감추기 위해 애써 무관심한 척했던 걸까?


남편은 자기표현에 서투르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나눈 대화는 '그래서 얼마 필요한데?'가 전부였다. 대화하는 방법도, 관계를 형성할 줄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인 개그로 만들어 날카롭게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그의 생존방식이었다. 마음이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지만, 냉정한 부모 아래에서 정을 주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남편의 떨리는 손가락을 보며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이 남자도 (나랑) 사느라 힘들었겠구나!

나는 과연 옳기만 했을까?


약해진 남편에 대한 나의 측은지심이 소위 말하는 부부간의 정인지, 내 안의 모성인지, 어쩌면 불가능할 이혼에 대한 재빠른 자기 합리화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역시 마땅히 사랑받아야 할 나약한 영혼이라는 것, 우리가 만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며,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2주간의 여행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공허함이 채워지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가여운 존재라는 것도 알았다.

 

번지점프대를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떠났으나 무사히 살아 돌아온(사실 죽을 만큼 위험하지도 않다)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나‘를 세우는 것이었다. ‘내'가 없는 희생과 헌신은 열심히 살았음에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결과를 줄 뿐이고, 결국은 나를 아프게 한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 순서를 돌려놓는다. 사랑이 먼저고, 희생과 헌신은 그다음이라고. 사랑이 먼저라야 희생과 헌신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나 자신도 없이 희생과 헌신만 하다가 헌신짝처럼 되어버리는 가여운 엄마는 내 엄마 세대에서 끝나야 한다고.


두 번째로, 열심히를 지우고 대신 즐겁게를 적어 넣었다. 무엇이든 즐겁지 않으면 열심히 하지 않을 것이며, 열심히 하기 전에 우선 즐겁기로 했다.


그간 남편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다시 한번 잘 살아보기로 한다. 나는 이제 언제든 혼자 떠날 수 있는 여자가 되었으니, 헤어짐은 꼭 지금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었다.



… 그때 고비를 잘 넘겼다는 것과, 부부의 인연은 부모와 자식의 인연보다 더 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요즘에 와서 한다.





이 글을 끝으로 브런치북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제 여행기를 읽어주시고 따뜻한 격려와 응원의 댓글을 주신 모든 작가님들과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브런치에서 지금처럼 오래도록 만나고 싶습니다.


특별히, 1화에서 어린 제 자신과 만나는 뜨거운 자기 발견의 순간을 그림으로 그려 주신 붕어만세 작가님께 정말 커다란 위로를 받았습니다. 엎드려 큰 절을 올리고 싶을 만큼 감사합니다.


* 감사하는 마음으로 붕어만세 작가님의 글을 옮겨봅니다.



** 또한, 제 글을 자신의 브런치에 소개해주신 여행 크리에이터 Joanna 작가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https://brunch.co.kr/@joannaice/3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