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랜턴 Feb 20. 2024

고생문이 열리던 날

딸의 변신은 무죄입니다.

1년여 만에 마주한 딸은 진액이 모두 빠져나가서 윤기를 잃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매미허물 같은 모습이었다. 두 번째 임신과 출산으로 피부는 꺼칠했고, 얼굴 표정은 육아에 지쳐 쪼그라들어 있었다. 몸은 말라서 살집도 없어지고 가녀린 체구로 모유 수유까지 해가며, 에너지 넘치는 아들놈 둘을 키우느라 힘겨워하는 티가 역력했다. 남편과 나를 보더니 시커멓던 딸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다. 오죽했으면 한국에서 밥벌이하는 엄마를 불러들였을까!


집 안은 예상했던 대로 총체적 난국의 상황이었다.


거실은 아이들 물건과 어른의 것들이 뒤섞인 채 어질러져있고, 개키다 만 수건과 옷가지들로 빈 공간이 별로 없다. 주방은 주방대로 기름 뒤범벅인 프라이팬들과 미처 치우지 못한 아침 설거지들이 쌓여있고, 식탁 위는 이런저런 물건들로 복잡하다. 쓰레기통은 이미 넘쳐나고, 마룻바닥에는 언제 떨어졌는지 모를 음식물과 음료수 자국들이 말라붙어있다. 최근에 흘렸는지 더러 끈적끈적한 것도 섞여있다.



휴~ 어지럽다 어지러워. 

고생하는 딸에 대한 측은지심도 잠시,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이건 육아뿐만 아니라 가사도우미의 역할까지 필요해 보였다.


급해지는 마음 가라앉히려고 시원한 냉수를 찾아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기겁을 한다.

야채, 과일, 날고기, 계란, 김치, 빵, 햄, 먹다만 볶음밥, 고추장, 된장, 소스류.....

이미 조리가 되어있는 음식류와 조리를 해야 하는 날 음식들, 그리고 먹다 만 음식들이 체계와 분류도 없이 마구 범벅이 되어 냉장고가 아니라 아수라장고였다.


아, 괜히 열었다.

 

예쁜 것 좋아하고 깔끔하게 살던 딸이, 아이 둘을 낳고 키우면서 이토록 무질서의 범벅이 되었다니...

그동안 본인이 받는 스트레스는 또 얼마나 심했을까.

무엇보다 육아와 생존이 우선이었던 만큼 정리 정돈의 개념은 거의 잊고 산 듯했다.


마당에도 할 일이 한가득이다.

뒷마당 잔디는 무성하게 자라서 무릎까지 올라오고, 채소 한 톨 없는 텃밭은 잡초로 들끓었다. 앞마당은 나무 이파리들로 덮여 지저분하고, 처마밑은 거미줄로 얽혀있다.

'휴~' 이번엔 남편의 심호흡 소리.


아무리 아이가 둘이어도 어떻게 집이 이렇게 되냐? 라떼는..... 하려다가, 미안해서 눈도 못 마주치는 딸을 보고 꾹 눌러 삼킨다. 그래, 살아있는 게 감사하고, 먹고사는 게 우선이지. 치우고 사는 게 뭐 그리 대수냐!


평온한 마음으로 무장하고 조용히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다.

 

나는 집 안에서 남편은 마당에서, 쓸고 닦고 치우고 버리고, 쓸고 닦고 치우고 버리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반찬도 몇 가지 만들어 놓는다. 남편은 쓰레기통을 정리하고, 마당에서 물 청소하고, 잔디를 깎느라 집 안으로 들어올 틈도 없다.


우리 부부는 도착하자마자 3-4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일했다. 실제로 손자를 안아주고 놀아준 건 아주 잠깐씩뿐이었다. 그날 저녁, 사위가 초밥을 사 갖고 들어왔기에 그나마 밥을 하고 설거지가 안 나온 것이 다행이라 여겨질 만큼 딸네 집은 일이 많았다. 


안팎을 쓸고 닦고 정리하며 손자들을 돌봐주는 황혼육아!

고생문은 이제 열렸고, 내일부터는 길고 긴 육아의 여정이 시작된다. 잘 되겠지... 잘 되기를...



이전 01화 현직 약사를 그만두고 황혼육아를 택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