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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Aug 10. 2024

<큐어> 감상문

    큐어(97')는 내게 '폭력으로 억제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최면술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살인을 교사할 수 있는 마미야는 살인을 통해 세상을 치유한다는 사이비종교의 계승자다. 이 사이비종교는 권총으로 쏜다고 근절할 수 없는 것으로서 표상된다.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큐어에서는 총구의 권력으로도 사이비종교의 폭력을 억제할 수 없었다. 사이비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적을 만나지 못한 채 영화 내내 압도적 힘을 과시하며 독주한다. 형사는 단 한 번도 최면술사이자 큐어교의 교주 마미야의 '적'이 되지 못했다. 형사에게 마미야는 정치적 적이 아니라 행정 관리의 대상이다. 형사의 정체성은 적을 정치적으로 패배시키는 자가 아니라 범죄를 행정적으로 관리하는 자다. 형사가 거듭 마미야를 두들겨 패려고 하고, 육체적 위해를 가하려고 하지만 결국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정치가 거세된 행정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가 거세된 행정이 평온하게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마미야의 것과는 다른 사이비종교, 그러나 사이비종교라는 점에서는 같은, 사이비종교에 의해, 자신의 무능을 자각하지 않을 수 있는 마비 수단을 제공받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학자가 일본의 '시민종교'라고 부른, 직분윤리에 대한 신앙이라고 봐도 좋다. 경찰은 경찰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삶의 의미를 보장해준다. '범죄자를 잡는 것, 사私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일'이라고 형사는 마미야 앞에서 선언한다. 형사는 현실적으로 무능하다. 마미야를 잡아 족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정신병자 아내를 낫게 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그런데 그는 그런 무능한 자신을 의식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식할수록 자괴감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무능을 가능한 무의식 속에 가라앉혀 놓고 싶어한다. 그의 삶은 곪아간다. 그는 자신의 권력의지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게 '관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마취제를 스스로에게 투약한다. 그 마취제의 이름은 경찰로서의 직분윤리다. 마미야가 형사에게 '당신만이 내 말을 이해한다'고 말한 것, 형사가 나중에 마미야를 계승하여 차기 교주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정치가 거세된 행정은 그 자체로 '사이비'스러운 것이다. 형사와 마미야의 대결은 사이비와 사이비의 대결이며, 그 대결을 통해 사이비스러움이 한층 더 심화되는 결말로 이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이 '사이비'스러움을 한자문화권에서는 공公과 사私의 대립으로 표현했다. 행정이 정치적 성격을 상실할 때 관료는 파사현정의 활기를 잃고 삶의 의미를 잃는다. 의미의 식별이나 추구, 선악의 구분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좋은 게 좋은 게 되는 것이다. '미덕도 공포도 원치 않는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들은 부패를 원한다'(생쥐스트). 관리의 부패를 비판하는 유학자는, 검사가 기소 사실을 열거하듯이 착복 사실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유학자는 관리의 착복 사건의 배후에 행정관료의 정치적 무력화가 도사리고 있는 것을 고발한다. 다르게 말해 공公에 대한 사私의 승리가 여기서 벌어졌다고 소리 높여 규탄한다. 이 관료가 사이비종교의 신도가 되었다고 공의여론公議与論의 광장에 대자보를 써붙인다. 제국의 관료가 되기 위해, 유학을 공부한 사대부가 되어야 했던 중국의 과거제가 놀라운 점은 여기에 있다. 과거제가 지탱한 중화제국은 사이비종교에 대해 인간이 지금까지 개발한 가장 강력한 치료제가 아닐까. 원칙적으로, 관료는 정치적으로 거세되어서는 안 된다. 행정관료가 자신의 행정 집행을 정치적 전쟁(내전) 행위,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천리天理와 분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리天理와 분리'라는 중립적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분리는 이미 천리天理를 저버린 것이다. 그것은 공公을 버리고 사私를 택한 것이다. 그러한 관료는 탄핵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 관료가 탄핵되더라도 그 직을 수행할 수 있는 다른 관료 후보자들, 그 직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주자대전을 몇 번이고 외워서 쓰고 읊을 수 있는 후보자들은 지나칠 정도로 많다. 그러나 주자학자 목민관이 (나치가 유대인에게 그랬듯) 모든 사이비종교 신도와 교주를 가스실로 보내는 체계적 절멸 프로젝트를 추진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유학자의 입장에서 교화가 덜 된 어리석은 백성이 공公보다 사私를 중시하고 온갖 종류의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랑캐와 어리석은 백성에게 예의를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이비종교가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즉 적당한 선을 지킨다면 그냥 놔둔다. 강박적으로 사이비 토벌에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중용을 잃은 것이다. 가만히 사이비가 하는 짓거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선을 넘으면 법에 따라 으깨고 죽이고 흩어놓으면 된다. 목민관과 큐어 형사의 가장 커다란 차이는, 목민관의 경우 사이비종교와 자신을 결코 동급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형사는 마미야도 자신과 똑같은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인권과 만민평등론이라는 전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목민관이 보기에 마미야는 인간이 아니다. 금수는 아니지만 금수라고 가리켜도 무방한, 거의 금수에 가까운 무언가다. 마미야는 계속 형사와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 형사도 마미야의 대화 요구에 응해준다. 거기에는 일종의 등가교환 같은 모습도 보인다. 마미야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형사에게 형사의 이야기를 요구하며, 반대로 형사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마미야에게 이야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불상사는 목민관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목민관에게 마미야는 짐승이나 다름 없으며, 인간이 짐승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천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만약 마미야가 주자학자의 재판에 끌려왔다면 그곳이 바로 그의 지옥이며 그는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 것이다. 조선에서도 중국에서도, 재판은 과학적 진실을 다투는 공간이 아니다. 세계의 질서를 바로세우는 공간이다. 많은 경우 재판의 결과는 거의 정해져 있다. 심문과 고문은 목민관 측과 피고인 측의 대등한 대결이 아니다. '싸운다'는 말을 하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르치는' 곳이다. 목민관이 피고를 교화시키는 것이다. 피고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하는 절차가 과학적 진실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했다. 그래야 천리에 부합하는 세계 질서가 회복된다. 짐승은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법에 의해 짐승에게 합당한 처치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도록(인정하도록) 교화되어야 한다. 때문에 고문을 해서라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목민관의 이러한 '재판'은 정치적 '탄압'과 별로 다르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천주교를 '탄압'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재판'이었다. 천주교도가 죄인이며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대개, 이미 정해져 있다. 고문을 해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만이 문제였다. 주자학 목민관들이 경악하고, 역시 천주교는 악질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천주교도들이 너무나도 쉽게 스스로의 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본래 주자학 재판에서 목민관을 어렵게 하는 것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정하게 만드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천주교도들은 뻔뻔하게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심문하고 고문할 필요도 없이 인정해버려서 목민관들이 놀랐던 것이다. 반면 천주교 같은 보편종교가 아니라 기억상실증 환자이자 사이비종교 교주인 마미야의 경우는 안타깝게도 고문을 받다가 죽을 확률이 훨씬 높다. 왜냐면 그가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까지 온갖 고문이 자행될 텐데, 영화에서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그가 자신의 행위를 기억해서 인정할 가능성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문을 가하면 갑자기 기억상실증이 치유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극형에 처해져서 저잣거리에 내걸릴 것이다. 

    목민관과 큐어 형사의 또 하나의 차이는 강박증의 유무에 있다고 썼다. 현대 행정국가는 천리天理에 부합하는 폭력과 천리天理에 반하는 폭력의 구분을 폐기하는 동시에, 모든 폭력을 강박증적으로 규율하려 한다. 주자학에서는 오래 전부터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고 왕이 수신제가를 해야 천하가 평안해진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 국가가 이미 사이비스럽게 돌아가는데 민간에서 사이비종교가 활개치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도리를 따지지 않고 모든 폭력을 강박증적으로 규율하면 공동체도 학교도 해체된다.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 수 없고 부모가 자식 단도리를 할 수 없으며 공동체가 구성원 규율을 할 수 없다. 모든 행위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어야 하고, 그런 것이라고 규정된다. 조선에서는 사대부의 집안에서 불미스러운 아들이 나오면 아버지의 명으로 살해하기도 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였듯이 '이것은 집안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일일이 살인사건으로 처벌하지 않은 것은 앞서 말했듯이 목민관의 통치가 강박증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선을 넘는 일이 아니며, 때로는 도리에 부합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이비종교가 함부로 날뛸 수 없다. 목민관 눈치만 봐야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가 활동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목민관이 사이비종교를 굳이 관아에까지 끌고 와야 하는 상황이 애초에 많이 생길 수가 없다. 최면으로 살인 교사를 하고 돌아다닌다면 이내 마을에서 발각될 것이다. 유가족을 중심으로 마미야에게 피의 복수를 가할 것이다. 빠르고 고통 없이 죽여주기만 한다면 다행일 것이다. 

    유가족이 마미야에게 가하는 피의 복수와 큐어에서 형사가 마미야에게 가하는 친구의 복수(권총 발사)는 다른가? 목민관의 관점에서는 다르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둘 다 사私적인 것에 불과하다. 공의여론의 광장과 무관한 음습한 어둠 속에서 부는 피바람에 불과하다. 구래의 습속을 어지럽히는 마미야를 죽였으니 유가족의 복수는 그래도 장壮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형사는 마미야를 계승하여 살인을 교사하고 다닌다. 그렇다고 형사의 복수가 유가족의 복수보다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형사의 복수가 사이비적 살육의 고리를 끊지 못했다면 유가족의 복수도 사이비적(흑산도에서 서로 얼굴 다 아는 동네 사람들이 여교사를 성폭행하고 덮으려고 하는 공동체의 사이비성) 살육을 끊어내는 것은 아니다. 유가족이 패거리를 지어 역시 다른 친족집단과 사私적인 살육 항쟁을 계속하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보면 마미야는 유가족 집단이 살해한 수많은 인간들 중 그저 지나가는 한 명에 불과하다. (마치 무송이 죽인 반금련이 그렇듯이) 돌진하는 호걸들의 발에 채인 한 포기 이름 없는 풀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는 다음과 같다. 큐어에서 마미야는 형사에게 건강을 가져다준다. 형사는 마미야를 죽이고 마미야의 대역이 됨으로써 좋은 혈색을 얻는다. 마미야를 죽이기 전에도 그는 직분윤리라는 사이비종교를 믿고 있었고 죽이고 나서도 큐어교라는 사이비종교를 믿었는데, 큐어교는 직분윤리가 주지 못한 건강(그야말로 니체적인 의미의 건강)을 가져다줬다. 그러나 중국 유가족의 경우, 마미야는 유가족에게 그런 종류의 건강을 가져다줄 수 없다. 직분윤리의 불건강과 큐어교의 건강은 거울쌍과 같은데, 직분윤리의 공허한 주체와 큐어교의 충만한 주체에 각각 대응한다. 이 거울쌍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관념이다. 직분윤리의 공허를 알기 때문에 큐어교의 충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며, 큐어교의 충만을 알기 때문에 직분윤리의 공허(마미야가 다른 경찰 간부들을 가리키며 저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형사 너만이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던 것을 상기할 수 있다)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중국의 유가족은 그러한 거울쌍을 지니고 있지 않다. 중국 유가족에게 '주체성'이 있다면, 그건 평면적 주체성이다. 거기엔 직분윤리의 공허와 큐어교의 충만 사이에서 발생하는 깊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유가족은 공허하지도, 충만하지도 않다. 그들은 살인이 구원이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공허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구원도 아니고 공허도 아닌 살인과 복수를 그들은 몇 천 년 동안 반복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반복할 것이다. 이 유구한 '유맹流氓'의 전통 앞에서 마미야 따위는 바다 위에 떨어진 빗방울만큼이나 미미한 존재다. 마미야 따위가 중국 유가족들에게 (마치 형사에게 그렇게 했듯이) 의미를 더하거나 앗아가고 그들의 평면성에 깊이를 부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구미欧米가 중국에 발전적 시간관을 도입할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오만한 생각이다. 중국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적어도 헤겔은 그렇게 오만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마미야의 사이비성은 낭만주의적(니체주의적) 사이비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 유가족의 사이비성은 (비록 흑산도에도 오가사와라에도 있지만) 중국적 사이비성이라고 불러보자. 

    큐어는 발사된 총알로도 멈출 수 없는 낭만적 사이비종교의 무시무시함을 그려낸다. 평론가들은 '우리 모두가 살인자가 될 수 있는 공포'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낭만적 사이비종교는 어느 정도는 무시무시하고, 또 매력도 있다. 하지만 결코 멈출 수 없는 것은 아니며 박멸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낭만적 사이비종교를 박멸할 수 있는 폭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첫째로 주자학(그것의 계승으로서의 동아시아적 정치-행정 협찬체제: 일본제국의 총력전 체제, 박정희 체제, 북한 체제, 마오의 중국공산당 등)이 그렇다. 둘째로 중국적 사이비성이 그렇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총알로도 죽일 수 없는 사이비종교가 第一義的인 교리로 작동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이 두 폭력을 식별하는 것만으로도 반동의 혐의가 없지 않다. 그럼에도 큐어의 '공포'를 무화시킬 수 있는 이 두 폭력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앞에서 현대사회가 자본주의-자유주의라고 했지만 동아시아의 경우 여전히 주자학과 중국적 사이비성이 엄존한다. 마미야 따위는 '폐급 관심병사'로 만들어버리는, 이토록 강력하고 끔찍한 폭력이 잔존해 있는 삼엄한 현실을 총체적으로, 있는 그대로, 명석판명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낭만적 사이비에 빠져서 눈앞이 캄캄한 사람들에게 주자학과 중국적 사이비성은 훌륭한 치료제가 될 수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주자학이나 중국적 사이비가 되느니 그보다 약하고 덜 끔찍한(혹은 여러 미학적 이유에서 더 매력적인) 낭만적 사이비가 되겠다고 마음 먹을 수도 있다. 본래 강함을 숭배하기에 '이능력자 배틀물' 같은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낭만적 사이비가 도리어 약하기 때문에 선택된다면 그만한 도착도 없다.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기독교의 핵심은 이러한 도착적인 낭만주의에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큐어가, 그리고 그와 유사하게, 누가누가 낭만적 사이비의 핵심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가 경쟁하기라도 하는 듯 백가쟁명하는 무수한 문화 컨텐츠들(무라카미 하루키, 하마구치 류스케, 박찬욱, 파울로 코엘료 등등)이 자유진영의 문화계에서 잘 팔리는 까닭은 낭만적 사이비와의 대결이 많은 이들에게 당면 과제가 되어버린 현대사회의 세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요컨대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의 낭만적 사이비에 빠지고 있다. 단적으로, 오늘날 같은 핵가족 사회에서 아내와 단둘이 사는데 아내가 정신병에 걸린다면, 낭만적 사이비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배기겠는가? 차라리 향악의 질서와 마을 공동체가 살아있어서, 정신병자의 남편으로서 낙인이 찍힌 채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나름의 애환과 질곡은 있을지언정 낭만적 사이비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경우, 세계의 질서와 그 속에서 아내의 지위, 그리고 그 의미는 공의여론의 장에서 정해지는 사안이지 남편이 혼자 텅 빈 아파트 식탁 앞에 앉아 무기력하게 해대는 망상 속에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망상 뒤에 찾아오는 공허 속에서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이런 사태는 바랄 수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망상과 공허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도탄에 빠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은 눈앞이 캄캄한 것이다. 공동체를 되살려서 중국적 사이비를 작동시키고 지배체제가 행정과 정치를 결합하여 주자학을 발동시킨다면, 아니, 적어도 세상에 중국적 사이비나 주자학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지식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한층 더 끔찍하고 강력한 폭력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통해, 마치 어른이 사소한 것에 세상 잃은 표정으로 슬피 우는 아이를 바라볼 때 여유 있는 미소를 짓게되는 것처럼, 낭만적 사이비에 빠져 눈앞이 캄캄해 우는 자기 자신을 어른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여유있는 미소야말로 낭만적 사이비를 바라보는 목민관의 미소이며, 낭만적 사이비를 처단하고 난 뒤 유가족의 미소이며, 낭만적 사이비의 도탄에서 스스로와 주변을 구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유머러스한 정신의 표현이다. 사실 지혜로운 민중은 이미 이것을 실천하고 있다. 연애라는 이름의 낭만적 사이비종교, 학생회라는 이름의 낭만적 사이비종교가 그들을 힘들게 할 때, 군대에 들어가서 회복하는 것이 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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