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생각한 제주가 아니야(1)

출발

by 철부지곰

“진짜 갈 거야?” 남편은 짐을 싸는 내게 제주 게스트 하우스에서 빈대가 나왔다는 기사를 들이밀며 초를 쳐댔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혼자 가는 여행이 나도 내심 걱정됐다. 20년 넘게 같은 직장에 다니고 있는 남편은 작년에 번아웃이 왔었다. 그래서 나는 제주에 사는 친구의 빈집을 보름간 빌렸다. 그리고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도록 해주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남편은 더 이상 회사에 가기 싫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 혼자 가는 여행을 반대하던 그는 그 후로 마음을 바꿨다. 드디어 내게도 기회가 왔다. 그래서 3박 4일의 일정으로 제주로 가는 비행기부터 예약했다. 하지만 떠날 날이 다가오자 두렵기도 했다. 여러 번 갔다 온 제주를 굳이 혼자 갈 필요가 있나, 하는 마음에 취소하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주사위 던지듯, 혼자인 내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저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호텔이 아닌 게스트 하우스에 2박 묵기로 했다. 그리고 남편의 잔소리에 마지막 1박은 호텔로 예약했다.


마침내 출발하는 날, 어쩐지 아침부터 몸이 안 좋았다. 생리를 시작한 것이었다. 여자들은 알 것이다. 생리 중 여행이 얼마나 불편한지를. 게다가 나는 생리통도 극심하다. 진통제를 먹어도 하루 종일 끙끙 앓는다. 여행 전부터 불길했다. 집에서 내내 침대 신세를 지다가 저녁 비행기를 타러 아픈 몸을 이끌고 공항으로 갔다.


비행기 연착으로 저녁 8시 반쯤 제주에 도착했다. 렌터카 셔틀버스는 8시가 막차였다. 연착만 아니었어도 계획대로 됐으련만.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그런데 어렵게 만난 승용차에는 자율주행 기능이 없었다. 11월 말의 제주는 5시만 지나도 깜깜했다. 성산에 있는 숙소는 40km 넘게 떨어져 있었다. 차도 낯설고, 앞이 막막했다. 하지만 하소연할 사람이 없었다. 짐을 싣고, 띄엄띄엄 놓인 가로등에 의지하며 암흑 길을 달렸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헤드라이트를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며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밤 10시였다. 그래도 무사히 왔구나, 안심하며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내 몸 하나도 힘든데, 짐을 들고 낑낑거리며 3층까지 나선모양의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Check In'이라고 쓰인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왔다. 학생은 엄마가 잠깐 나갔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짐을 들고 한 층 더 올라가니 객실이 있었다. 아이는 열쇠를 꽂았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어디든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소년은 내게 열쇠에 대해 잘 아느냐고 물었다. 열쇠가 열쇠지 뭐 잘 알아야 하는 게 있나,라고 생각하며 쑥 넣었더니 다행히 문이 열렸다. 꼬마 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신발을 벗고 들어갔는데 한기가 느껴졌다. 2층 침대가 두 개 놓여있었고, 한 숙박객이 안대를 한 채로 자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살짝 내려놓고, 화장실부터 갔다. 그런데 화장실에도 냉기가 가득했다. 선반은 비뚤어져 있고, 샤워부스도 없었다. 행주처럼 얇은 수건은 그나마도 달랑 한 장이었다.


'아, 남편 말을 들어야 했어, 호텔에 갈 걸….' 후회가 밀려왔다.


녁을 걸러서 배가 고팠다. 집에서 챙겨 온 인스턴트 죽을 꺼내 휴게실로 갔다. 안에는 넓은 창이 벽 한 면을 투명하게 채우고, 긴 나무 탁자가 네댓 개 줄지어 놓여있었다. 테이블 중간에는 노란끼가 도는 밝은 갈색머리의 여자분이 휴대전화로 영상을 보고 계셨다. 인사를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화면에서 영어가 흘러나왔다.


'아, 외국인이시구나.'


우리는 어색한 눈인사만 나누었다. 그리고 그를 등지고 앉아 창가에 앉았다. 검푸른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전자레인지에 데운 죽을 먹었다. 시간 조절에 실패해 과하게 뜨거웠지만, 휘휘 저으며 빠르 들이켰다. 그리고 살금살금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 대충 씻었다. 드디어 오랜만에 빳빳해진 몸을 침대에 누였다. 삐걱거리는 침대의 매트리스는 토르티야처럼 쿠션감이 거의 없었다. 이불을 덮어도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다. 그래서 혹시 창문이 열렸는지 일어나 확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건 아니었다.


혼자 와서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었다. 걸어두었던 롱패딩을 껴입고 모자까지 덮어썼다. 평소에는 모자에 달린 털이 간지러워 거추장스러워했었는데, 처음으로 털이 더 길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스크를 쓰고, 장갑도 꼈다. 집에 두고 온 포근하면서도 과학적인 내 침대가 그리웠다.


'집 나오면 고생, 혼자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진리를 되새기며 잠이 들었다.


- 2편에서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