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 알람이 울렸다. 새벽 5시 반이었다. 성산일출봉에서 해돋이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날이 흐렸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는 이번 여행에서 날씨까지 바라는 것은 사치다. 그냥 가는 거다.
룸메이트가 깨지 않게 나갈 채비를 했다. 밖으로 나오니 주위가 어두웠다. 우뚝 솟아있는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며 골목길을 걸어갔다. 성산일출봉이 정면에 보였다. 올라가는 입구를 찾아야 했다. 나는 오른쪽에 있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풀을 뜯고 있는 말과 마주쳤다. 깜짝 놀랐지만, 말도 놀라면 재난영화가 될 수 있으므로 최소한의 몸짓으로 뒷걸음질하며 다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왼쪽에 사람들이 보였다. 그곳이 입구였다. 매표소는 아직 영업 전이었고, 그 앞에는 커다란 막대기 세 개가 가로로 놓여있었다. 그런데 틈새는 내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문의 모양은 제주의 전통 방식이기도 했지만, 해돋이를 보러 오는 무단 관광객을 위한 배려로 느껴졌다.
애국가에 자주 등장하는 성산일출봉은 수성화산체로 해발 180m 높이이다. 그리고 분화구 넓이는 8만여 평에 이른다. 압도적인 크기에 걸맞게 오르는 길은 계단 지옥이었다. 550개가 넘는 돌계단에 숨이 헉헉 차올라 쉬고 싶었지만, 밝아오는 사위가 걸음을 재촉했다. 머뭇거리다 일출을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어지러웠지만 참고 올라갔다. 내일 날이 좋으면 또 오려고 했었는데, 올라오면서 그 마음이 싹 사라졌다.
간신히 태양보다 먼저 정상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앉아서 모두 한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원형경기장처럼 비스듬히 경사진 계단에서 나도 빈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앉아서 숨을 돌렸다. 주머니에서 텀블러를 꺼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은 어둠이 남은 푸른빛의 찬 공기 속에서 커피를 입에 오래 물고 있다가 삼켰다. 풀 내음과 과일 향이 섞인 커피의 온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갔다. 초코볼까지 입 안에 넣어 굴리니, 몸에 잔뜩 끼어있던 긴장이 걷히면서 정신이 맑아졌다. 하지만 동쪽 하늘은 달랐다. 아직도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해 뜨는 것을 볼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러는 사이 분화구 너머 푸른 바다 끝 수평선에서 태양이 얼굴을 내밀었다. 모두 붉노란 한 점을 응시했다. 사람들은 드디어 해가 뜬다고 기뻐했다. 그리고 들썩들썩 어수선해졌다. 관중들은 일행과 함께 우르르 일어나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급한 약속이 있는 듯 한꺼번에 좌르르 내려갔다.
나는 잠자코 앉아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천천히 감상했다. 그런데 진짜 클라이맥스는 사람들이 한차례 가고 난 다음이었다. 오히려 구름 덕분에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태양 광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햇빛으로 음영이 두드러져 구름의 양감이 더욱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수평선과 맞닿게 나란히 깔린 구름 융단이 잔잔한 파도 물결과 연결되어 하늘이 바다 같고 바다가 하늘 같았다.
곧 사라져 버릴 아름다운 정경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분주하게 사진을 찍었다. 그중 한 가족이 눈에 띄었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번갈아 다양한 포즈를 취했고, 아들은 저만치에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계단에 휴대폰 놓고 카메라 각도를 고정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얼른 다가가 사진을 찍어드리겠다고 했다. 그는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다며 급히 아들을 불렀다. 일출을 보러 여기까지 따라와 부모님의 길고 긴 사진놀이를 말없이 참아주는 소년이 대견했다. 그래서 주머니 속에 있던 초코볼 한 봉지를 쥐여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려왔다.
올라올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빨갛고 파란 지붕이 모여있는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제주도 동부의 수십 개의 오름도 멀리까지 환히 보였다. 그렇게 바닷풍경을 감상하며 내려오는데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정상에서 사진을 찍어줬던 아이의 어머니였다.
내가 준 초콜릿을 맛있게 나눠먹었다며 내 사진도 꼭 찍어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좀 더 앞으로 나오세요, 이 쪽으로 몸을 트세요, 등의 적극적인 연출까지 해 주셨다. 혼자 다니면 아쉬운 점이 사진이다. 물론 나는 대한민국 아줌마로서 부탁도 제안도 잘하는 편이지만,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를 발견하셨다니, 올라갈 때는 혼자였지만 내려올 때는 혼자가 아닌 느낌이었다.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 조식을 먹으러 공용 거실부터 갔다. 안에는 어제 인사를 나눴던 외국인 여자분과 주인이 앉아 있었다.
-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