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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한 제주가 아니야(3)

by 철부지곰 Feb 15. 2025


“어머, 어제 제가 10시까지 기다렸다가 아이를 데리러 간 사이에 체크인하셨죠? 그래서 못 봤네요. 벌써 어디 다녀오신 거예요? 저희 조식은 토스트예요. 근데 그냥 토스트가 아니에요. 제주 감귤이랑 사과를 넣어서 상큼하고 맛있어요. 우리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거죠. 달걀도 들어가는데 괜찮으시죠? 아무 데나 앉으시면 돼요. 커피랑 차는 저기 있어요.”     


  사장님은 무척 쾌활하고 밝았다. 그녀는 쉬지 않고 단어를 쏟아냈다. 중간중간 질문을 하기는 했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얇게 썬 제주 감귤과 채 썬 사과, 노른자가 흘러내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익어서 뻑뻑하지는 않을 정도로 알맞게 익은 계란 프라이, 신선한 양상추가 들어있는 따끈한 토스트를 금세 만들어 접시에 담아 주었다. 말처럼 손도 빨랐다.      


  어제 뵈었던 금발의 여자 손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진짜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올레길은 어땠냐는 사장님의 질문에 “억수로 좋았지예.”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토종 한국인으로 창원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여행객들과 나눠 먹으려고 집에서 원두를 넉넉히 갈아왔다. 드립 커피를 드시겠냐고 물으니 그녀는 괜찮다며 커피믹스를 뜯었다. 사장님은 이게 웬 호강이냐며 내가 내려준 커피를 여유 있게 음미했다.      


  어제는 깜깜해서 몰랐는데 이곳은 파노라마 오션뷰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통창 너머 성산일출봉이 왼쪽에 우뚝 솟아있고, 윤슬이 반짝이는 푸른 바다 위로 고깃배가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수십만 원짜리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았다. 맞은편 벽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사진과 쪽지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위쪽에는 성경 구절이 적힌 액자가 있었다.      


  나는 사장님께 교회에 다니시냐고 물었다. 그녀는 95년 된 역사 깊은 성산포교회에 다닌다며 오늘은 마침 청년부에서 홍콩 선교여행 자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도 한다고 신나게 5분 동안 홍보하셨다. 나는 새벽 바닷바람을 맞으며 수 킬로미터를 걸어온 터라 물먹은 솜처럼 피곤했다. 쉬려고 방에 들어가니 룸메이트는 떠나고 아무도 없었다. 비수기여서 새로 올 사람도 없다고 했다. 사장님께는 슬픈 소식이었지만 내겐 굿뉴스였다. 덕분에 단돈 2만 원에 바다가 보이는 4인실을 혼자 차지하는 행운을 누렸다.      


  예배 시간에 맞춰 성산포교회에 갔다. 오래됐지만 단단해 보이는 붉은 벽돌과 정면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이었다. 예배당 입구로 들어가니 여행 오셨냐며 안내장을 주셨다. 예배를 마치고 바자회 음식을 먹으러 교회 식당으로 갔다. 처음이어서 어색했지만, 제주에서 보기 힘든 젊은이를 볼 수 있어 반가웠다. 제육 덮밥과 식혜를 주문해 다른 교인들과 섞여 앉았다.


  음식 맛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맛이 없었다. 모름지기 제육 덮밥은 실패하기 힘든 메뉴이다. 고추장 양념에 재운 돼지고기를 야채와 볶아 밥에 부으면 그런대로 먹어줄 만한 제육 덮밥이 된다. 그런데 내 상식과는 다른, 제주만의 조리법이 있는지 색깔부터 허여멀겋다. 나는 요리가 미숙해 맛에 관대한 편이다. 그런데 이건 아무리 은혜롭게 먹으려 해도 돈 생각이 났다. 우물우물 씹으며 다른 교인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 다른 테이블에 음식을 갖다 주는 숙소 사장님을 발견했다. 나는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했다.


  “어머머! 정말 오셨네! 진짜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뭐 주문했어요? 맛있죠? 아침 일찍부터 청년들이 직접 만든 거예요. 이제 어디 가요? 이 근처 오조리 마을 가봤어요? 거기 얼마 전에 드라마도 찍었어요. 탤런트 누구였더라, 그 멀끔하게 생긴 남자배우도 왔었는데.... 암튼 재밌게 구경해요. 난 바빠서 오래 얘기는 못 하겠네. 이따 집에서 봐요. 그리고 요 앞에서 도시락도 파니까 들러요.” 하며 바쁜 사장님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역시 대답할 틈은 없었다.


  나는 남은 식혜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따듯해 겉옷을 벗고 동네를 걸었다. 어쨌든 배가 부르니 어디든 갈 준비가 됐다. 사장님이 말한 잘생긴 남자배우가 누구일지 생각하며 여유롭게 오조리 마을을 구경했다. 이곳은 고요한 바다와 해안의 곡선을 따라 지은 집이 모여있어 시간이  듯 평화로웠다. 자연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내가 바라던 마을이라 할 만했다. 마을을 둘러보고 차에서 찾아보니 이곳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웰컴투 삼달리’였다. 아쉽게도 멀끔한 배우 지창욱 님은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그분의 자취를 느끼며 '해녀의 부엌'을 보기 위해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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