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편지 #15

by 철부지곰

사랑하는 아들에게


네가 인후통으로 병원에 갔다는 문자를 받았어. 코도 막히고 기침할 때 피도 섞여 나왔대서 걱정했는데 6월 모의고사 끝날 때까지 참았나 봐. 몸도 아픈데 6모 보느라 고생했어. 결과도 만족스럽다니 다행이야.


지난주에 삭발할까 고민한다고 해서 설마 했는데 정말 밀어버렸다니! 네가 돌이 지나도록 거의 민머리여서 아직도 동글동글 귀여운 머리통이 눈에 선해. 두상이 예뻐서 지금도 어울릴 것 같아. 다 신생아 때 짱구 베개에 누여가며 빚어낸 엄마의 노력 덕분이란다! 네 모습이 어떨지 상상하고 있었는데, 네게 온 메시지!


“나 까만색 모자 사서 보내줘. 급해!”


응급 상황이니 출근길에 서둘러 모자를 검색했지. 마음에 들어도 배송이 오래 걸리면 탈락! 로켓 배송되는 것으로 골랐는데 잘 도착했니? 크기는 잘 맞고? 모자 착용 전후 사진을 보고 싶은데 아쉽네.


오늘은 현충일이어서 여유로운 아침이었어. 그런데 늑장을 부리면 시간이 휙 지나가 버릴 것 같아서 혼자 청계산에 갔어. 너처럼 모자부터 챙겼어. 지난번 산에 갔다 와서 거울을 봤는데 형광 연둣빛의 애벌레가 앞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날씬한 몸이 머리카락을 따라 구불거리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지. 산에만 있다 보니 심심해서 도시를 구경하고 싶었던 걸까? 언제부터 붙어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산에서 내려와 지하철도 타고, 마트도 갔었는데 계속 동행했었다니! 원효대사는 해골 물을 통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달려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를 깨달았지만, 미천한 엄마는 산에 갈 땐 모자가 필수라는 것을 깨우쳤지.


청계산입구역에 내리니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 산에 가면 같은 목적을 가진 동지가 있어서 힘들어도 결국에는 목표를 이루게 돼. 갈래에서 제 갈 길을 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곁에 누군가는 있지. 엄마의 목적지는 옥녀봉! 옥녀봉은 해발 375m로 2km 정도 걸으면 다다르지. 30도까지 오르는 더운 날씨여서 걱정했는데, 나무가 푸른 잎을 넓혀 그늘을 만들어 준 덕분에 시원했어. 시간을 가장 꾸준하고 성실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연인 것 같아. 헛되이 흘려보내는 법이 없으니 말이야.


계단이 꽤 많아서 숨을 헐떡거리며 올랐어. 그러다 쉼터가 보여서 정자에 앉았는데 푸른 잎을 나부끼는 바람이 시원했어. 땀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올라왔는데, 쉬니까 오히려 땀이 주르륵 흐르더라. 이곳은 올라온 거리와 앞으로 남은 것이 비슷한 지점이야. 6모를 치르고 수능을 앞둔 너와 거의 같은 처지지. 이쯤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많이 남았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해.


“조금만 가면 돼요. 이제 힘든 것은 다 지나갔어요.”


그 말만 믿고 얕잡아 보면 큰일이지.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거짓말한 것은 아닐 거야. 아마 그들은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길이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 진짜 짧고 쉽게 느껴졌을 거야. 너도 내년 이맘쯤엔 후배들에게 유사하게 조언할지도.


정자 기둥에 기대어 집에서 가져온 방울토마토를 깨물었어. 달큼한 과즙과 상큼한 과육이 입안을 적셔주었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니 목구멍을 지나 등줄기까지 시원하게 퍼져나갔어. 어제 병원 갔을 때 몰래 빵집에 가서 빵 사 먹다가 걸려서 벌점 받았다며. 아마 네가 숨어서 맛본 그 빵도 이렇게 달콤했겠지.


네 앞에 힘든 길이 남아있지만, 네 곁에 동지가 있어서 마음이 놓여. 네 머리도 친구가 바리깡으로 직접 깎아줬다며. 머리를 맡긴 너도, 그걸 깎은 그도 정말 용감하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 빵이든 뭐든 잘 먹고 머리털이 무럭무럭 자라길 간절히 바란다.


2025년 6월 6일 금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그런데 무슨 빵 샀었니? 카드 사용 내역을 보니 2300원을 썼던데, 소보루빵? 단팥빵? 걸렸을 때 네 표정을 상상하니 웃기다ㅎㅎ


<답장>


소보루단밭빵 먹었어 ㅋㅋㅋㅋㅋㅋㅋ 아 그리고 모자는 원내규칙상 착용금지라서 한 번 쓰고 못쓰게 됨ㅠㅠ. 휴가일에 쓰고 나가려고. 일주일 동안 거의 사람 지나갈 때마다 피해 다녔는데 이제 그나마 적응해서 가끔 후드모자 벗고 다니기도 해. 휴가일엔 좀 더 길어서 나아지겠지

keyword
이전 15화편지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