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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9

by 철부지곰

사랑하는 아들에게


비가 정말 많이 오네. 러닝을 시작한 후로 엄마에게 날씨는 둘로 나뉘어. 달리기 좋은 날과 그렇지 않은 날. 요즘엔 비가 오거나 너무 더운 날이 많아서 적당히 흐린 날이 소중해. 오늘은 비가 그쳐서 한강을 따라 9km를 달렸어. 평균 페이스 6분 50초!


같이 달리는 분들이 엄마 기록에 놀랐어. 엄마만 끝까지 계속 달렸거든. 다들 묻더라. 어떻게 그렇게 오래 달릴 수 있냐고. 멈추고 싶지 않냐고. 근데 비법은 싱거워. 그냥 달리던 대로 달리는 것. 힘들어도 가던 방향대로 발을 내딛는 것. 속도와 보폭은 상관없이 멈추지 않는 것!


처음엔 엄마를 앞서갔던 분들이 지쳐서 걸을 때도 혼자 달렸어. 처음부터 9km를 달려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초반에 포기했을 것 같아. ‘우선 시작만 해보자. 여기서 1km만 더 가보자. 8분은 넘기지 말자.’라는 마음으로 달렸어. 그랬더니 반환점을 돌아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더 힘이 났어. 이제 남은 거리가 온 것보다 더 짧다는 생각에 힘을 더 쏟고 싶어졌어. 그 덕분에 기록을 더 단축했지.

얼마 전에는 스페인 출신의 사진가 ‘요시고(Yosigo)’의 전시에 갔었어. 4년 전에 네 아빠와 처음 갔었는데, 그때 작가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찍은 물빛과 건물 사진이 따듯해서 인상적이었지. 이번에 또 한국을 찾았다고 해서 반가운 마음에 관람했어. 그런데 작가의 본명은 ‘호세 하비에르 세라노 에체베리아’라는 긴 이름이야. ‘Yosigo’라는 이름은 사진을 찍겠다고 선언한 호세에게 아버지가 선물한 시 한 편에서 인용한 것이래. 그 시는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것, 즉 ‘yo sigo(계속 나아가다)’를 실천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시였대.


전혀 재능이 없다고 느꼈던 아들에게 아버지의 시가 용기를 불어넣었다고 해. 작가는 어떤 일의 결과가 생각대로 이뤄지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본능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했어.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응원과 이에 보답하려는 아들의 신념이 ‘Yosigo’라는 이름에 담겨있는 것이지.


할아버지가 지어준 너의 이름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부지런히 배움에 힘쓰라는 뜻의 네 이름.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사랑하는 손자가 바라는 것을 꾸준히 배워가길 기도하고 응원하고 계실 거야. 엄마도 네가 부지런히 나아가는 과정의 소중함을 기억하면 좋겠어.


너도 점심시간에 러닝머신으로 30분씩 달린다고 했지. 그럼 달린 후의 개운함을 알겠네! 그 뿌듯함도! 남은 기간 동안 멀리 가지 않아도, 빨리 가지 않아도 되니 계속 나아가길. 멈추지 않는다면 발전하고 있는 것이니 지칠 때마다 네 이름을 곱씹으며 계속 달리길 바란다.


2025년 7월 18일 금요일

사랑하는 엄마가

PS. 000 학생은 6월 4일에 시행한 평가원 모의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학원에서 내부적으로 정한 장학 기준을 충족하여 장학생으로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앞으로 남은 기간도 열심히 하여 목표한 바를 달성하시길 바랍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면 더욱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답장>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딱 휴가복귀 2주 차 때 요맘때가 가족생각도 많이 나고 적당히 쉬고 싶어지고 그러는 것 같아. 그래서인지 어젯밤에 뭘 했는진 잘 기억 안 나지만 엄마랑 같이 뭔갈 하는 꿈을 꿨어.
휴가까지 2주 남았으니 지금이 나한테도 반환점이네! 태풍은 전향점에서 가장 느려지다가 전향점을 지나면 다시 급격히 빨라져. 나도 휴가 때까지 다시 각성하고 페이스를 끌어올려 보려고.
Ps. 머리 많이 길어서 담 휴가땐 미용실 가야 될 듯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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