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모두가 그를 그렇게 불렀다.
터벅터벅. 중절모를 쓰고 반듯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자는 오늘도 빼놓지 않고 주점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래, 술만 한 친구가 없더라니까. 이곳에 자주 들르는 사람들도 마음에 들고 말이야. 그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쓰고 있는 안경을 벗어 안경닦이로 안경을 닦아낸다.
"오늘은 뭐가 그렇게 묻었길래 닦고 그러나?"
주점으로 들어서 안경을 닦고 있자 주점의 주인이자 바텐더인 늙은 여성이 그에게 인사하듯 내뱉고 웃어 보였다. 그는 까딱, 목례하고는 어깨를 으쓱이곤 안경닦이를 주머니에 넣고 바텐더가 보이는 자리 앞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일이 영 피곤해서 말이죠. 신사(紳士)로 사는 게 이렇게 피곤한 일인지 몰랐어요. 빌어먹을 교양. 웃긴 게 뭔지 아세요? 신사라고 하며 신사라는 작자들을 만났는데 죄다 되다만 놈들밖에 없어요. 그런 새끼들이 무슨 신사를 한다는 건지."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고 늘 마시던 술을 주문했다. 근데 이 술은 어쩜 색도 저렇게 아름다울까. 정말 보기만 해도 신사 같은 것은 이 술인데 말이야. 바텐더는 그의 말에 호응하듯 내뱉고 잔에 희석시킨 술을 따라 주었다. 압생트, 지금은 그런 성분은 제외하고 나오고 있다고 하지만 오래전에 고흐가 마시고 귀를 잘랐다는 소리가 붙은, 환각제가 들었다고 알려졌던 술이다. 오늘은 블루. 이게 색이 더 보기 좋지. 마치 새가 울고, 꽃이 핀 숲에 숨겨진 작은 연못의 물색처럼 느껴지거든.
"그러고 보니 바텐더님도 아버지가 신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직까지 바텐더님이 뭐야. 그냥 편하게 언니나 희라고 부르라니까. 내 이름 끝 글자, 희."
"아, 알겠어요! 하여튼 신사라고 하셨죠? 아버지께서는 신사답게 돌아가셨나요?"
"말도 마. 네 말대로 그놈도 되다 말았지. 그런 놈이 무슨 신사를 한다는 건지. 끝까지 헛소리만 하다가 갔어.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그는 제 잔을 빙빙 돌려가며 바텐더의 말을 들었다. 하긴, 신사라는 말은 어쩌다가 남자들에게 붙은 건지. 다들 신사라는 이름 속에 숨어서 온갖 더러운 짓이란 더러운 짓은 다 하고 다니던데.
아, 그런데 신사, 당신은 왜 신사가 된 거야? 그런 놈들 근처에 섞여서 하는 일이 있나? 바텐더가 다른 손님이 비우고 간 잔을 치우며 물었다. 바텐더의 질문에 그는 그저 제 잔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술을 마시며 웃을 뿐이었다. 바텐더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잠시, 바텐더는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자리를 비웠다. 그는 술 냄새가 나는 숨을 내뱉으며 혼자 실소했다. 그리고 술을 몇 모금 더 마시더니 아무도 없는 허공에 조용히 숨을 내뱉듯 입을 열기 시작한다.
내가 말이죠, 새로운 취미생활을 하나 들였거든요. 예술, 그래. '예술'요. 나는 원래 미술을 하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여러 사람들을 알게 되고 만났어요. 정말 유명한 사람들도 만났지…. 여성이든, 남성이든 닥치는 대로 만나고 친분을 쌓았어요. 근데, 진짜 재밌는 걸 봤어. 미술작품을 사는 신사들 말이야, 그중에서도 이상한 걸 요구하는 놈들이 있더라고. 여성의 아름다움… 뭐 그딴 걸 지껄이면서 말이야. 이런, XXX. 하. 그들이 사는 건 예술품이 아니었다고요. 본인들의 쾌락이었지. 미친 XX들. …그래서 그 사람들이랑 친해지려고 신사가 됐어요. 아, 단어 뜻으로 나한테 XX 하던 놈도 있더라고요. 신사라는 단어는 남자를 지칭한다나 뭐라나. 저는 숙녀가 되어야 한다고. XX. 아주 다들 쇼를 하고 있어, 아주. 진짜…. 근데 어쩌나, 나는 紳士라고 한 적 없는데.
"하여튼 그들이랑 친해진 이유는… 그러면서까지 그들에게 붙어서 이것저것 들어내는 이유는, 그래야 그 자가 왼손잡이인지, 아닌지 알 수 있잖아요. 잠은 언제쯤 자는지, 수요일 밤엔 무슨 일을 하는지.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잖아."
"언제 병까지 들고 와서 멋대로 마시고 있었던 거야? 또 혼자서 취해서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겠네. 이제 한가한 시간이라 이야기 좀 더 하려고 했더니."
"… 벌써 그렇게 됐어요? 음, 음. 시간 다 됐네."
그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했다. 1분 1초도 늦으면 안 되지.
"도대체 집에 가는 것도 아니고 술을 저렇게 진탕 마시고 어딜 간다는 거람."
"… 어으, 오늘도 잘 마셨어요. 외상 알죠?"
"알아. 얼른 가봐. 네가 언제 그런 거 떼먹었었니."
"알겠어요. 언니, 신사는 갑니다."
"예, 예. 신사님, 들어가세요."
역시 화끈거리는 것이 아주 좋은 술이야. 블루는 맑은 연못이 생각나서 아름답고. 그것들을 마시면 내 속이 마치 하나씩 정화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속으로 퍼져나가는 술이, 아, 어찌나 시원한지. 민트가 들어간다고 했었나? 민트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이 술에 들어간 민트는 어쩐지 계속 찾게 돼.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작고 낡은 집. 누가 봐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아니었다. 그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집에 발을 들인다.
"내 사랑스러운 친구들아, 내가 왔다. 오늘 사냥감은 아주 새파랗게 젊은 놈이야. 힘이 넘쳐서 조금 여러 번 겨눠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는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가득 전시되어 있는 활과 화살촉을 꺼내어 그것들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터트린다. 아, 확실히 칼보다 좋은 무기긴 하더라.
"나는 신사라고 했잖아. 새롭게 취미를 들였는데 꽤 재미있더라고. 멀리서 겨눌 수도 있고, 나한테 많은 양의 피가 튈 일도 없고 말이야."
술을 마시고 나니 알 수 없는 희열감에 휩싸이는 것 같아 그는 당장이라도 이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누군가의 심장을 꿰뚫는 장면을 보고 싶어졌다. 정확히 명중했을 때의 그 짜릿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걸. 거기에 그걸 맞은 놈들의 표정을 살펴보면, 그래. 그게 예술이지! 예술은 이런 거 아니겠어? 머리라면 머리, 눈알이라면 눈알, 귀라면 귀, 심장이라면 심장… 거기에 꽂혀 있는 화살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왜, 난 안 돼? 너네가 외치던 여성의 아름다움… 그걸 달리 생각해 봤어. 난 이런 남성의 아름다움이 참 좋더라.
자, 오늘은 어떤 예술 작품을 만들어볼까? 역시 오늘은 심장이 당기지? 그 XX, 영 마음에 들었는데 조금 아쉽네. 젊은 놈이라 종종 쓸만한 데가 있었거든. 멍청하기도 멍청해서 휘둘리는 꼴도 웃겼고. 근데 뭐, 그래서 더 예술작품이 되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는 화살과 활을 챙겨 들고는 제 안경을 벗어 내려둔다.
"매일 주점에 가는 시간마다 안경을 새로 맞춰야 하는 꼴이 되어서 오늘은 벗고 가도 되겠어. 감으로 맞추는 거지. 안경이 또 깨지면 곤란하니까."
신사(新射), 그는 웃으며 활을 들고 밖으로 나선다. 예술에 미쳐버린 그는 술도, 사냥도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미친 자는 술을 가까이하며, 술에 의지해 새로운 정신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세계에 잠겨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창조해 낸다. 아, 이 얼마나 끔찍한 예술가인가!
紳士: 점잖고 예의 바르며 교양 있는 남자
新射: 새로 활을 쏘기 시작한 사람
당신이 생각하는 신사는 무엇인가? 예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주인공은 예술을 사랑하게 되면서 신사가 되어 아름다움을 찾아 나서던 인물이다. 그가 발견하고 만들어 낸 아름다움은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글 속의 주인공은 활을 처음 배워 사냥을 시작하게 된 자, '아르테미스'의 과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