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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Nov 10. 2024

성균관으로

  성안의 일가가 순천으로 떠나기 위해 동헌에서 살림살이를 빼 마차에 실었다. 부사 일가의 짐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소박한 세간이었다. 몇 날 며칠을 떠들썩하게 짐을 정리하며 떠나는 여느 부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단출했다. 그 흔한 송별회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찾아온 지기들과 덕담을 주고받으며 조용히 떠날 준비를 했으니, 성안의 일가가 떠나는 날도 차분한 분위기였다. 배웅을 나온 관리들과 백성들이 고을의 어귀까지 줄지어 서서 예를 갖추었다. 게 중엔 눈물을 흘리며 흙바닥으로 납작 엎드려 절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양이 멀리서 이성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웅삼이 이성의 어머니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이성이 수양을 만날 도리가 없었다. 성안의 부사의 순천 부임 소식은 남원 고을 사람들에게 모두 알려진 사실이었으므로 수양도 이를 알고 있었다. 곧 이성에게서 기별이 올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수양의 마음에 서글픔이 밀려들며 갖가지 생각들로 마음이 괴로웠다. 여진이 며칠 새 눈에 띄게 야위고 창백해진 수양을 걱정했다.


  “도련님도 사정이 있을 거야. 올 수 있었다면 벌써 왔을 거야.”


  여진이 말했다.


  “그렇겠지. 안 그러면 이렇게 날 내버려 둘리 없지. 그치?”


  금방이라고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방울이 수양의 눈에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그럼, 곧 기별이 올 테니 기다려 봐. 그리고 도련님과 만나려면 낯이 이렇게 창백해서야 되겠니. 뭐라도 좀 먹어야 생기가 돌지. 오던 임도 돌아서겠다.”


  여진이 수양을 달래며 잣죽을 내밀었다. 수양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여진이 내민 잣죽을 한술 떠 억지로 입으로 밀어 넣었다. 나무 향이 은은하게 번지며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감도는 부드러운 미음을 목이 메어 좀처럼 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 아무런 기별도 없이 이성을 떠나 보내야 했다. 멀리서 이성이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떠나면 언제 오시려나. 금세 나를 잊으시려나. 아니야, 그럴 리 없지. 도련님은 그럴 사람이 아니지. 내게 한 고백들이 어찌 거짓일 수 있어. 그 눈빛이 어떻게 거짓일 수 있어. 저렇게 가야 하는 도련님 마음도 많이 괴로울 거야. 순천이면 그래 한양도 아닌 순천이라면 곧 소식을 전하러 오시겠지. 다시 날 찾으러 오실 거야. 아니, 다시 못 볼지도 몰라. 그럴지 몰라…….’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멀어지는 이성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몸속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 퍼내면 퍼낼수록 많아지는 우물처럼 흘려도 흘려도 눈물이 차올랐다.


  이성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혹시 수양이 나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장옷을 두른 여인들을 눈여겨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책없이 눈물이 앞을 가려 더는 주위를 둘러볼 수도 없었다.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성안의가 모른 척 고개를 돌려주었다.

 

  순천으로 오면서 어머니 김 씨가 부쩍 이성의 생활을 주시했고, 웅삼 마저 곁에 머물게 하지 못하게 했다. 그 바람에 남원에 있는 수양에게로 소식을 전하는 일이 여의치 않았다. 가족들이 순천에 머무는 동안 이성은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성은 외부와 단절된 채 성균관 내에서만 지냈다. 딴 마음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철저하게 학문에만 전념했다. 이성이 한양으로 입성하고 학문에 전념하는 동안 수양은 이제 이성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전보다 더 혹독하게 예인으로서의 기량을 다지는 데 전념할 뿐이었다. 그런 수양의 곁을 여진과 행수가 지켜주었다. 수양은 언덕바지에서 이성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후 몇 날 며칠을 울며 지냈는지 모른다. 행수는 수양이 충분히 울고 슬퍼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저렇게 울고 쏟아 내야 병이 안 나는 법이지.”


  행수는 한동안 수양을 행사에 내보내지 고 교방에 머물게 했다. 수양의 행실이 참하고 성실하여 유독 이뻐하는 것도 있었지만 정인을 보내고 이별의 아픔을 겪는 기생이 있을 때면 이별 휴가를 주는 것처럼 시간을 주었던 것이다.


  “수양아, 너 괜찮은 게야. 뭔 연습을 그렇게나 하는 게야. 그러다 쓰러지겠다.”


  여진이 밤이 늦도록 살풀이춤 동작을 연마하는 수양에게 말했다.


  “차라리 쓰러졌으면 좋겠구나!”


  살풀이 동작을 멈춘 수양이 말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도련님을 못 잊은 게야?”


  “누굴 말하는 게야. 하도 오래되어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데, 못 잊기는 누가 못 잊는다고……. 우리 신세가 하도 서글퍼서 그런 거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 신세가 말이야. 가는 사람 붙잡지도 못하는 게 기생이잖아. 그냥 꽃처럼 가만히 피었다 저버리면 그만인 우리 신세가 말이야……, 너무 서글픈 거야.”


  여진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자 수양이 다시 살풀이 동작을 이어나갔다.


  “그래 살풀이라도 해야 네가 살지. 살려면 춤이라도 춰야지. 밤새 한풀이라도 해야지.”


  여진이 혼잣말처럼 조용해 말하고 돌아섰다.     


  한편 이성이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 한기태가 유생으로 이미 수학 중이었다. 한기태는 늘 무리를 짓고 다니며 힘을 과시했으므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얘기 들었는가?”


  이성과 함께 성균관에 들어온 김헌이 말을 걸었다.


  “무슨 얘기 말인가?”


  “한기태 무리 말일세!”


  “성균관 유생이면 유생답게 학문에 정진할 일이지, 매일 무리 지어 다니면서 거드름이나 피우니 뻔하지 않겠나. 별로 관심 없네만…….”


  이성의 무관심한 태도에 김헌이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거드름이나 피우고 말면 그만이겠지만, 그게 아니니 하는 말일세. 김자점 세력에 붙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세하니 말하는 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세하다니?”


  “유생들 중엔 이미 한기태 무리와 손잡고 도당을 이룬 이들이 있네. 만에 하나 한기태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성균관에서의 생활이 무척 힘들어질 거라 이 말일세.”


  “안 그래도 나라가 어수선한데, 학문에 전념해야 할 유생들이 정치색으로 도당을 이루다니……. 한심한 노릇이지 않나. 그런 어설픈 힘 싸움엔 관심 없네. 그런 도당이 있다면 상소를 올려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나.”


  “허참,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인가! 안 그래도 지방에서 올라온 유생이라고 동기고 선배고 할 것 없이 우리를 무시하는 눈치이지 않은가. 이 와중에 무슨 객기로 상소를 올리나.”


  “그렇게 두려운가? 혹시 괴롭게 하는 이가 있으면 내게 말하게.”


  “거참,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겁이 없는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자네도 조심하라 이 말일세!”


  나라가 어지럽다 보니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서도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임금을 비판하는 자와 청나라와 친선을 유지하는 임금을 지지하는 자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성은 이런 혼란기일수록 물러나 자숙하며 군자에 이르기 위한 학문과 도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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