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대청마루로 나왔다. 하마터면 버선발로 내려올 뻔했다.
“혹시 수양이라는 이름의 기생을 아시오?”
관기 명부를 건네받은 이성이 관리에게 물었다.
“수양이란 이름을 가진 기생이 있긴 있습니다만…….”
이성이 명부를 빠르게 훑었다. 관리의 말대로 수양이란 이름을 가진 기생이 있긴 했다. 하지만 한 명이 아니었다.
“동명인이 있군요!”
“이름이 같은 기녀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생들을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수양이란 이름을 가진 기생들만 부르면 되겠나이까?”
“우선 그랬으면 합니다만.”
이성의 마음이 급해졌다. 평소 그 답지 않게 가슴이 두근거리며 순식간에 온몸에 잔열이 돌았다. 어쩌면 수양을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이렇게 쉽게 수양을 찾을 수 있다면 행수가 여태 찾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행수도 모르는 사이 정말 수양이 전주로 왔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관기들의 일정을 살펴 풍락헌으로 데려오겠습니다.”
“아니, 내가 직접 교방으로 가겠소이다.”
“그렇다면 교방의 일정을 확인한 후 기별 드리겠습니다.”
관리가 물러난 뒤에도 이성은 관기의 명부를 찬찬히 살펴봤다. 수양뿐만 아니라 동명이인이 많았다. 관찰사가 이성의 어깨너머로 명부를 보고 있었다.
“기생들은 주로 예명이나 별명을 쓰니 같은 이름이 많을 겝니다.”
“그런가요!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입니다.”
“이것 보시오. 성이 없이 두 글자로 된 이름이 많지 않습니까. 양반가에서 흘러들어온 아이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네들도 이전 신분을 숨기고 싶겠지요. 꼭 양반뿐만 아니라, 출신 성분이 어디든 간에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이성은 관기 이전의 수양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몰락 양반가의 자제가 아닐까 짐작만 했을 뿐 출신 성분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었다. 관기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일일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순간을 수치심과의 싸우고 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런 그녀에게 과거를 묻는 일은 상처 위에 더께 앉은 딱지를 벗겨내는 일이었으므로…….
얼마 뒤 교방에서 사람이 왔다.
“내일 사시(巳時)에 오시라고 합니다. 기녀들이 아침 식사 후 휴식을 가지는 시간이오니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알겠네. 내 조금 일찍 도착하겠다고 전해주게.”
이성의 마음이 급했다. 혹시 수양이란 이름의 기녀들 사이에서 그녀를 찾지 못하면 어쩔까 고민이 되었다. 어느새 칠흑으로 사위가 둘러싸인 밤이 되어 이성이 홀로 사랑채에 남겨졌다. 말도 지쳐 모로 누워 잠든 밤, 이성은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몸을 뒤척였다. 머릿속에서는 내일 펼쳐질 상황을 떠올려 보느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수양이 아니면 어찌해야 할까. 기생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해야 할까. 그래도 수양이 없다면……. 진정 어찌해야 할까…….’
수양을 만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내일 당장 수양이라는 이름의 기생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그녀는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만에 하나 진짜 수양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허투루 넘기지 않으리라 다짐하다가도 다시 부질없는 일이 되어 버릴 것이란 좌절감이 강렬하게 밀려왔다. 피로로 얼룩진 몸이 땅속으로 끌려 들어갈 것 같았지만 정신은 잠들지 못했다. 몸은 이미 잠이 든 것처럼 꼼짝할 수 없는 지경인데도 각성된 의식 속에 수많은 생각의 덩어리들이 쾅쾅 머릿속을 두드려댔다. 마치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몸이 의식에 갇힌 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먼 데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성이 눈을 떴다. 가만히 누워 눈만 감고 있었을 뿐 한숨도 이루지 못한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붉은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김없이 동은 트고 수양을 찾으러 교방으로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두려웠다. 수양이란 이름의 기녀들, 명부에 박힌 이름이 낯설었다. 그녀를 기생으로 대해본 적 없던 이성으로선 기생으로서의 수양을 또렷이 대면하는 것 같았다. 그토록 그리던 수양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수양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가 사랑한 여인에 대한 그리움도, 그것이 진정한 그리움인지 혼란스러웠다. 어느 순간 그녀를 찾는 게 그가 꼭 해야 할 업으로 다가왔다. 이성이 그녀를 포기하는 순간 세상의 그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은 채 잊힐 것만 같았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거의 손을 대지 않자 관찰사가 입을 댔다.
“찬이 입에 맞지 않은 게요? 어찌 이리 먹지 못하는 것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모래알을 씹고 있는 것처럼 서걱입니다.”
“잠을 통 이루지 못한 모양이구려. 눈이 붉게 충혈되었소이다. 암행이란 게 참으로 고된 일이지요.”
“신경 쓸게 많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편히 잠들어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납니다.”
“암행에 장사 없는 법이지요.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기적입니다. 떠돌이 생활이라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수행원도 없이 혼자 다니는 것도 위험천만한 일이지요. 특히 큰일을 치르고 난 후엔 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죄인들의 일당들이 자객을 보내는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관찰사는 이성을 대하는 태도가 하룻밤 사이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네, 실종되거나 객사한 암행어사가 있다는 얘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조직적으로 연계된 경우가 많다 보니 하나를 건드리면 줄줄이 달려 나오는 게 비리의 속성이지요.”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지요. 내 힘닿는 대로 지원해 주리다.”
“이렇게 먼저 말씀해 주시니 벌써 힘이 납니다.”
도와주겠다는 호의적인 태도만으로도 이성을 누르던 무게가 한결 덜어지는 듯하였다.
약속 시간이 되어 이성이 교방으로 갔다. 관리가 수양이란 이름을 가진 기생들을 데리고 나왔다. 곱게 단장한 여인 세 명이 이성 앞에 절을 올렸다. 예상대로 이성이 찾고 있는 수양이 보이지 않았다. 짐작은 했지만, 막상 자신이 찾는 수양이 아님을 확인하자 맥이 빠졌다.
"혹여, 그대들은 남원에서 온 기생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가?"
물색없이 앉아 있는 기녀들에게 이성이 물었다. 기녀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짖을 주고 받을 뿐 아무도 대답이 없자 모두 물러나게 했다.
“혹시 지금 다른 기생들도 볼 수 있겠소?”
이성이 막연히 서 있는 관리에게 물었다.
“지금이야 관기들이 쉬는 시간이니 행수에게 말해 모아보겠습니다. 헌데 명부에 있는 모든 기생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아닙니다. 때때로 다른 곳으로 출타해 며칠 자리를 비우기도 하지요.”
“그렇군요. 그럼 우선 이곳에 있는 분들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잠시 후 교방의 마당으로 기생들이 모두 나왔다. 기생들을 모두 모아 놓으니 마당이 가득 찼다. 대충 봐도 30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이성이 마당의 작은 정자 위로 올라가 전체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수양은 한 눈에 알아볼 것 같았다. 곱게 치장을 한 기생들이 이성을 생뚱맞게 올려다봤다. 자기들끼리 뭐라고 쑤군대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낄낄대는 기생들도 있었다. 역시 이곳에도 수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성은 끝까지 눈을 떼지 않은 채 들어가는 기생을 한 명 한 명 눈여겨봤다. 곱게 치장한 여인들이 모였다가 흩어진 마당이 유난히 휑하게 비어 보였다. 텅 빈 마당으로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가자 기녀들이 남기고 간 은은한 향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을 타고 들어온 하얀 나비가 이성의 주위를 맴돌았다. 시간이 멈춘 듯이 나비의 날개만이 느리게 펄럭였다. 이성의 시선이 나비를 좇던 그때 나비가 이성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다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고 바람을 따라 나비가 날아갔다. 이성은 그 나비가 마치 수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을 뻗었지만 금세 허공으로 사라졌다.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