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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Oct 30. 2024

엽전 다발과 은

  임실에 도착하자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시기 시작했다. 볕이 나자 오봉산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붕어섬에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이성이 너럭바위 앞에 말을 세웠다. 너럭바위에 앉아 여진이 챙겨준 보자기를 펼쳤다. 말린 간식과 다과가 가지런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이성이 아침 요기를 하기 위해 마른 과일을 집었다. 그런데 그 아래에 낭자 두 개가 보였다. 이성이 궁금하여 낭자를 집어 들자 제법 묵직함이 느껴졌다. 작은 보자기임에도 제법 무게가 나갔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열어보니 엽전 다발과 은이 들어있었다. 대충 봐도 100냥은 족히 넘어 보였다. 안 그래도 암행 경비가 떨어진 터였다. 전주의 풍락헌에서 부윤이나 관찰사를 만나 떨어진 경비를 마련해 볼 참이었다. 거절할 걸 알고 간식 보자기에 몰래 넣었을 행수의 알뜰한 마음을 생각하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무엇보다 수양을 찾는 데 써달라는 무언의 당부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엽전 다발과 은이 든 낭자는 따로 챙겨 전대에 넣어 둔 뒤에야 곶감 하나를 입에 넣고 씹어 보았다. 곶감 안에서 마른 과일의 속살보다 견고한 것이 오도독 부드럽게 부서졌다. 씨를 발라낸 자리에 호두와 잣을 채워둔 것이다. 꾸덕꾸덕 응축된 단맛에 의외의 고소함이 더해지니 입안 가득 풍미가 가득했다.


  “암행 중 이런 호사라니! 내 그대들의 알뜰한 챙김 잊지 않겠네!”


  마치 행수가 앞에 있기라도 한 듯 말했지만, 이성의 앞에는 수면 위로 물방울을 피워 올리는 뿌연 물안개뿐이었다. 괜스레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자갈과 나무와 풀에 맺힌 아침 이슬이 분주히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성이 실없이 혼자 웃었다. 간식만 먹어도 전주에 도달할 때까지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문전박대를 당하며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잠을 청하던 때를 생각하니 여진과 행수의 챙김이 유난히 가슴 뭉글하게 전해졌다.


   아침 요기를 끝낸 이성이 쉬지 않고 가는 바람에 풍락헌까지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풍락헌에는 마침 관찰사가 집무실에 나와 있었다. 이성이 마패를 꺼내어 신분을 밝히자 깎듯이 맞이했다. 두 사람이 사랑채에 마주 앉았다.


  “어사께서는 어디에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남원에서 오는 길입니다. 남원 부사 한기태와 육방의 탐학과 횡포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더이다.”


  “큰일을 치르고 오셨군요. 전주로 홀로 올라올 만큼 급한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사람 한 명을 찾고 있습니다. 남원의 교방에 기거하던 기생 소식이 묘연한 상황이라 수소문해 보려고 왔습니다.”


  “그거야 교방에 알아보면 될 터인데, 어렵지 않은 부탁이니 내 바로 교방으로 사람을 보내겠소이다. 헌데 어떤 기생이길래 어사께서 직접 나서는 것인지요?”


  관찰사가 호의를 보이며 깍듯이 예의를 차렸지만, 의심의 눈으로 이성의 표정을 살폈다. 이성이 예상한 반응인 듯 표정에 흔들림이 없었다.


  “한기태의 수청을 거부하다가 억울하게 형벌을 받은 기생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죽을 것 같아서 행수가 관료를 매수해 몰래 빼낸 모양인데, 행방이 묘연하다며 수소문해 주기를 부탁하더이다.”


  “교방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고 하던가요?”


  “한기태가 알면 또 찾아서 괴롭힐까 봐 몰래 수소문해서 그런지, 통 소식을 들을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나선다고 별수 있을까도 싶었지만, 행수가 음지에서 숨 죽여 찾는 것보다 나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요.”


  “그렇군요. 그런 일이라면 수행원을 시켜도 될 일일 텐데…….”


  관찰사가 턱수염을 쓸며 곁눈으로 이성을 아래위로 훑었다.


  “수행원들은 남원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서 이행 중이고, 일이 끝나는 대로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어차피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니 제가 먼저 와서 수소문하는 게 일정을 지체시키지 않을 것 같았지요. 수행원이 관에 협조를 요청하기도 어려운 처지이고……. 해서, 이곳에서 관기 명단을 얻을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관찰사가 생각 외로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자, 이성이 사정을 좀 더 소상히 밝혔다. 무엇보다 이성은 괜히 관찰사의 가벼운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기생과의 치정 관계를 의심하게 하지 않으려고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성의 태도가 미더웠던 관찰사는 의심을 거두고 특유의 호방한 말투로 말했다.  


  “교방 관리에게 기별을 넣으리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요기라도 하시면서 남원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서리로 보이는 자가 들어와 관찰사로부터 지령을 받고 풍락헌을 나섰다. 잠시 후 사랑채로 상이 들어왔다. 상 위의 음식은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정성스럽고 먹음직스러웠다. 이성이 갖가지 나물과 육회, 계란 지단을 올린 비빔밥을 젓가락으로 비비고 있을 때였다.


  “모주라는 건데 한 잔 드셔 보시지요.”


  관찰사가 소매를 살짝 걷어 이성의 술잔에 모주를 따랐다. 가을 콩 같은 부드러운 갈색이 입맛을 다시게 했다.


  “색이 아주 먹음직스럽습니다.”


  이성도 관찰사의 잔에 모주를 따르며 말했다. 은은한 계피 향이 코끝에 먼저 닿았다. 고개를 사선으로 돌려 입을 살짝 대자 음용하기 좋을 만큼의 단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술이 약한 이성에게도 그리 부담되지 않는 술이었다.


  “이건 술이라기보다 식사와 함께 곁들이는 식혜 정도로 생각해도 좋은 음료입니다.”


  “그렇군요. 취기도 오르지 않고 좋습니다. 모주만 마셔도 가벼운 요기가 될 것 같군요.”


  이성이 흡족해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비빔밥도 드셔 보시구려. 이곳은 육회가 일품인 데다, 제철 나물은 또 얼마나 신선한지 모르오.”


  관찰사는 음식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신이 나서 설명을 곁들였다. 육회를 별로 즐기지 않는 이성의 입맛에도 비빔밥에 곁들인 육회는 거부감 없이 넘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육회를 익혀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업무 수행 중 대접받는 자리에서 자잘하게 취향 따위를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함께 식사하는 동안 관찰사는 이성에 대한 경계를 온전히 푼 것 같았다.


  “그래 그 기생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시겠소. 한기태가 도대체 어떤 작태를 부렸는지에 대해서 말이오.”


  “고을의 수령과 관료들이 관기를 함부로 부리는 일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악습이지요. 출두 후 한기태의 직위를 박탈하고 창고를 봉쇄한 후에도 고을 사람들이 계속 찾아와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고했나이다. 다른 사건들은 조사하면 밝혀질 일이었지만, 이 건은 사람이 실종된 일이라 사안이 가볍지 않았지요. 수청을 강요하며 기생들을 파리 목숨처럼 가벼이 여기는 폐단을 끊어내고 싶었나이다.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목민관이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여인의 정절을 무참히 짓밟고 그것도 모자라 교방에도 지속적인 피해를 주었으니 그 죄질이 참으로 저속하여 그냥 넘어갈 수 없었나이다.”


  “허허, 거참. 부끄러운 일이로고. 그런 인간은 관직을 박탈하고 다시는 힘을 가질 수 없도록 단단히 엄벌을 내려야 할 것이오. 기생을 농락한 또 다른 벼슬아치들은 없는지 호남 전체를 돌며 감찰해 봐야겠소이다.”


  관찰사의 호방한 말투와 동감하는 태도에 한 시름 놓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교방의 관리가 명단을 들고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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