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진희 Oct 23. 2024

바라옵건대

  이성은 행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수양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 어쩌면 행수가 아니었다면 수양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 생각했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은 채 행방이 묘연하지만, 이성은 직감했다. 수양이 어디선가 살아 있을 것이란 걸.


  “저는 나으리께서 이곳으로 행차하신 게 왠지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행수가 온화한 표정으로 이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남에 연고가 없어 이곳으로 파견된 것뿐이네. 어떤 정념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라네.”


  어느새 냉정을 찾은 이성이 차분히 대답했다.


  “물론 나으리께서 남원을 그리워하거나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려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하오나 인연이 깊은 곳이니 아무리 업무차 파견된 곳이라고는 하나 아무렇지 않다면 마음을 속이는 것이 아닐는지요.”


  “어느 곳에 있든 내겐 모두 보살펴야 할 곳이고 백성이거늘 개인적인 인연이나 감정에 연연한다면 어찌 정사를 살필 수 있겠나. 그래 내게 들려주고 싶은 사연이란 게 무엇인가?”


  “한기태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왕 그의 죄를 물으시는 김에 그의 잘못을 낱낱이 아뢰고자 나으리를 찾아뵈었습니다. 한기태의 악행은 부호의 양민에서부터 백정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백정에게까지……. 참으로 지독한 인간이로군!”


  이성이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미간에 주름이 선명하게 그어졌다.


  “네 나으리, 주로 소를 잡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백정들이 잡아 놓은 고기를 무작위로 거두어들이곤 했지요. 방을 붙이거나 따로 알리지 않고 무작위로 시행하곤 했습니다. 사실 백정들은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관에서 사람을 보내 알리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습니다.”


  “데, 백정들의 사정을 행수께서 어찌 그리 잘 아는 겐가?”


  “교방에서 고관대작들을 접대하기 위해 연회를 여는 날이 많으니 백정들과 거래가 많은 편이지요. 품질 좋은 고기를 구하기 위해 특별히 부탁하여 물건을 대고 있습니다. 관에서 백정들의 고기를 그런 식으로 걷어가고 나면 피해를 보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지요. 민가는 물론이고 주막 주인부터 상인들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걷어간 고기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해지는구려.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사용했을 리는 만무하고…….”


  “진휼에 소고기를 사용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분명 사적으로 잔치를 여는 데 사용하거나 관리들의 배를 불렸을 것입니다. 한기태는 유난히 유흥을 즐겨 교방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인물입니다. 그 많은 연회를 열면서 얼마나 많은 고기가 사용되었겠습니까. 무엇보다 관아에서 소고기를 잡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공고한 시기에도 관아에서는 잔치가 열렸고 잔칫상엔 소고기가 끊임없이 올라 왔었으니까요.”


  “백정들에게서 고기를 압수한 시기와 잔치와 연회를 연 시기를 조사해 봐야겠군.”


  “아마 문서로 그걸 모두 작성해 놓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자신들의 비리를 그리 자세히 기록해 놓았겠습니까. 하지만 고기를 빼앗긴 백정이 있고, 금지령이 내려지는 기간 동안 피해를 본 민가와 상인들이 있으니 그걸 알아보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죽지 못해 거죽만 겨우 남은 채 연명하고 있는 시기에 잔치와 연회가 끊이지 않았다니, 내 그냥 넘기지 않을 터.”


  “관아가 백성을 보살피는 곳이 아니라 그야말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곳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연회가 잦았다는 걸 눈여겨보셨으면 합니다. 한때 백정들에게 소를 못 잡게 금지령을 내린 시기였습니다. 관아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고을의 부호 수백 명을 초청한 자리였지요. 우리 기생들도 불려간 자리였습니다. 그날 초청된 자들은 술이 건하게 취한 상태에서 관아에 아무개 곡식 몇 섬을 바치겠노라 서약을 하고 돌아갔나이다.”


  “수탈하는 방법도 다양하군. 듣도 보도 못한 일이고, 한기태가 아닌들 어떤 목민관이 그런 일을 벌이겠는가.”


  “그날 분명 문서를 작성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나이다. 물론 그 문서가 남아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 그날 서약하고 돌아간 이들은 아마도 술에 취해 한 서약이라 기억도 못 하는 이들이 수두룩하였을 것이옵니다. 후에 마치 빚쟁이에게 쫓기듯 관아에서 독촉을 해오면서 그날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왔는지 뚜렷이 떠올렸을 겁니다.”


  “그런 일을 어찌 함구하고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조용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양민의 신분으로 그만한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어디 보통 사람들이겠습니까. 그 일로 한동안 시끄러웠습니다. 그 일로 관아와 대치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걸 아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요. 눈 밖에 난 부호들에게 틈만 나면 추징을 하였습니다. 봄에는 종자를 기부하게 강요했고 흉년에 구휼미를 바치게 강요했었지요.”


  “백성들의 노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겠군. 아무리 양반의 세상이라도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다간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네.”


  “양반의 나라에서 저희 같은 천것들이 어찌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겠습니까. 미천한 제가 정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수양처럼…….”


  행수의 입에서 수양의 이름이 거론되자 이성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행수의 눈을 응시했다.


  “부호들도 그런 취급을 당할진대 관기 신분인 저희는 그 서러움을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관기는 원래 사사로인 부릴 수 없다는 건 엄연히 국법으로 정해져 있는 사실인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그렇네만…….”


  “관기 중 눈에 띄는 기생들이 여색을 밝히는 관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있었습니다. 수양처럼 수청을 거부하는 관기들은 여자로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가혹한 형벌을 당해야 했지요. 그중에서도 예기들은 수청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아니 수청을 들면 안 되는 아이들이지요. 엄연히 예인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하지요. 밤새 수청을 들 상대가 필요하다면 시정의 작부를 찾으심이 맞지 않겠습니까. 어찌 예기들의 정절을 힘으로 무참히 짓밟으려 하는지……. 오랜 세월 그런 관행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행수의 자리를 물러나기 전에 잘못된 관행이 시정되는 것을 보고 갈 수만 있다면 이 미천한 노기 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나라에서도 엄연히 여성들의 정절 의식을 미덕으로 삼고 있고, 비록 사내라고 하더라도 문란한 생활을 경계하고 있거늘, 하물며 고을을 다스리는 관료는 더욱 문란한 생활을 경계해야 하거늘……. 내 기생들에게 수청을 강요하고 교방을 드나들며 사사로이 관기들을 농락한 관료들을 샅샅이 조사하여 그 책임을 물을 것이네.”


  이성은 행수가 비록 기생 신분이긴 하나 그의 생각의 깊이가 얕지 않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존귀함이 결코 신분이나 힘에 기인하지 않음을 생각하며 수양을 떠올렸다.


  “수양은 참으로 아까운 아이였지요. 지금까지도 그 애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백방으로 알아보고는 있습니다만 아직 어느 곳에 정착을 못 한 것인지……. 바라옵건대 수양의 소식도 살펴주소서. 수양은 나으리 만을 기다리며 끝까지 정절을 지켰나이다. 예기로서 성공할 수 있는 재목이라 제가 어떻게든 지켜주고 싶었지만 미천한 처지라 역부족이었나이다.”


  수양을 아끼는 행수의 마음이 이성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이성은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성이 비록 암행어사이긴 하나 엄연히 정해진 일이 있고 일정에 매인 몸이어서 자유롭게 수양을 찾아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사사로이 수행원들을 시켜 수양의 소식을 탐문하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양은 이미 그의 사람이었으니 행수보다 더 수양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 보다 내가 더 수양을 찾고 싶어. 수양이는 엄연히 부사 한기태로 인해 부당한 형벌을 당한 기녀이니 내 수소문해 볼 것이네.”

이전 14화 끝나지 않는 부조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