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방이 수양이 고문을 당하던 당시의 목격담을 늘어놓자, 마치 자신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 수양의 고통을 지켜보는 듯했다. 힘이 들어간 이성의 두 눈에서 핏줄이 터진 것처럼 핏발이 섰다.
“사또께서는 기생년이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며 노발대발하였습니다. 그날 수양이는 ‘맞아 죽어도 좋다.’ 뭐 이런 각오로 자기 할 말을 한 듯했습니다. 사또의 겁박에도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똑바로 응시하더이다. 무슨 사달이 나도 날 듯했지요. 사또의 명령으로 곤장을 치고 주리를 틀고 형을 치르긴 했지만, 거기에 있던 그 누구도 수양이 고통스럽게 고문을 당하길 원하지 않았습죠. 명령에 따르지 않는 날엔 본인들이 성치 못할 터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형방이 은근슬쩍 본인들의 잘못이 아님을 호소하려 하자, 이성이 그루 쥐고 있던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사또가 공권력을 사적인 탐욕을 채우기 위해 휘두르는 동안 이방과 형방이라는 자들이 옆에서 지켜보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해 몸을 사리고 있었더냐!”
이성의 호령에 형방이 납작 엎드려 몸을 떨었다.
“어사 나으리,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죽여 주시옵소서.”
형방이 이성의 기에 눌러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동안 이방이 입을 열었다.
“우리라고 어찌 시키는 대로만 했겠습니까요. 저는 사또를 모시면서 누누이 군자의 도리를 들어 곡진하게 말려도 보았습니다. 수양이란 기생을 옥에 가둘 때도 사사로이 형을 집행해선 안 된다고, 후에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계의 말씀도 드렸습니다만 씨알도 먹혀들지 않더이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고을로 부임해 오시는 위정자의 인격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사실 저희가 제일 죽을 맛이지요. 본의 아니게 동조자와 방관자가 되어버려 이처럼 일을 치르게 되니 말이지요.”
“허허, 여전히 그대들은 자기 잘못을 반성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구나! 힘없는 고을 백성들과 정절을 지키고자 하는 여인이 고통을 당하는데도 자기 목숨과 몸을 사리기에 급급한 것을 이토록 당당히 말하다니. 참으로 개탄스럽도다! 개탄스러워! 고을 사또의 인격에 기대어 형을 집행해야 한다면 육방은 모두 허수아비라는 말이구나! 엄연히 법이라는 게 있거늘 법치를 하라고 앉혀 놓은 자들의 입에서 그게 나올 말이더냐. 이런 불충하고도 어리석은 자들을 봤나!”
이성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처럼 작고 찢어진 이방의 눈을 보며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 알 수가 없는 눈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낮고 느릿느릿하면서 높낮이 없이 조곤조곤 말하며 상대를 집중하게 만드는 그가 간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방은 한기태가 오기 전부터 오랫동안 관아의 곡식을 빼돌리며 사유재산을 불리고 있었다. 이미 장부와 실재 창고 곡식 양이 다른 이유가 이방에게 있다는 증거를 찾은 상황이었다.
‘죄를 짓고도 죄책감이라곤 없는 놈이로구나! 참으로 간악한 놈이 한기태와 붙어 있었으니 그간 고을 백성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고. 한기태가 수양을 낙점한 것도 저 간사한 이방이 남원의 일색이라 주둥이 놀렸을 것이 틀림없다.’
맘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방을 잡도리하여 실토하게 만들고 싶었으나 지금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양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소식을 알 수 없는 지금 저 미천하고 간사한 이방 하나를 잡도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수양은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살아 있긴 한 것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이 상황이 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이성은 끊임없이 수양을 보호하지 못한 자신의 불찰임을 되뇌며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탐욕적인 사또라 하더라도 어진 부하를 만나면 함부로 설치지는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자 저런 여우 같은 이방이 다시는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직권으로 파직 처분을 내리리라 다짐했다.
취조를 마친 이성이 서리에게 다른 주막을 찾아 잘 곳을 마련하라고 명했다.
“이번엔 관아에서 멀리 떨어진 주막으로 거처를 마련해 두어라. 밤새 서계를 작성해야 하느니라. 사람들이 찾아오면 밤새 아무 것도 못할 것이니.”
“네 주무실 곳을 마련하는 대로 제가 모시러 오겠습니다. 며칠째 잠을 못 주무시고 계시니 몸이 상하실까 염려됩니다요.”
서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어쩔 것이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 터에…….”
이성은 서리를 너그러이 바라보며 말했다. 서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관아를 나섰다. 서리가 나가자 이성은 청에 쌓아놓은 장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기태를 이번 기회에 제대로 죗값을 치를 수 있도록 처치하고 싶었다. 하지만 워낙 뒷배가 공고한 자라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만 해도 파직공고를 하고도 남을만했다. 하지만 암행어사가 제아무리 탐관오리의 악행을 증명하여 파직을 시키고 귀향을 보내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복귀가 되는 일이 많았다. 어떨 땐 서계를 보내 임금께 직접 처단을 해달라고 청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조치가 없이 지나치는 경우도 있었다. 목숨을 걸고 암행을 감행한 보람은 온데간데없고 괜한 적만 만들어 후일에 곤란한 일을 당하는 일도 허다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성이 당장 한기태가 죗값을 치르게 한다고 해도 후일에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밤늦은 시간에 관아에서 떨어진 곳에 거처를 구하느라 한참이 지난 후 서리가 관아로 이성을 데리러 왔다.
새로운 거처로 들어선 이성은 내일 관아로 고을 사람들이 몰려올 것을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수양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저밀 듯 아프다가도 탐관오리들을 처단할 생각으로, 뜨거워진 가슴이 서늘하게 식기를 반복했다. 날이 밝았을 때 이성의 몸이 흥건히 땀으로 젖어 있었다. 몸은 한기가 스며들어 오한이 든 것처럼 떨렸으나 이마에선 여전히 땀이 흘러내렸다. 주모가 내준 따뜻한 누룽지 죽으로 빈속을 달래고 얼마간 몸을 추스른 후 물먹은 솜이불처럼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관아로 향했다.
관아 앞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고을 사람들로 북적였다. 동이 트기 전부터 줄을 섰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고할 게 있어 찾아온 사람들도 밤새 잠을 못 이룬 것처럼 움푹 들어간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성은 신열이 나고 식은땀이 흐르는 채로 사람들의 사연들을 하나씩 듣기 시작했다.
“어사 나으리 고을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어 나가는 판에, 세금은 예년보다 몇 배를 더 많이 걷어가니 일년내내 농사를 짓고 품을 팔아도 가족들 입에 들어갈 곡식이 없는 지경입니다. 세금을 제때 못 내 노역장에 끌려가 매질을 당하는 게 일상이다 보니 사람들이 견디지 못해 야반도주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요. 헌데 야반도주 한 친척과 이웃의 세금까지 남아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니 살 수가 없습니다요. 부디 이런 사정을 살피시어 세금을 탕감해 주시고 당장 굶어 죽어가는 백성을 거두어 주소서.”
“자고 일어나면 아무개 집 누가 죽었다는 부고가 매일 날아듭니다요. 매질을 견디지 못해 가장이 목을 매어 죽거나 남겨진 가족들도 따라 죽기도 합니다요. 어차피 남겨진 가족들은 가장이 책임져야 할 세금을 감당해야 하고 당장 자식들 입에 들어갈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굶어 죽을 지경이니 따라 죽지 않고 어떻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날이 갈수록 도둑떼도 늘고 있어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자고 일어나면 소가 없어지기도 합니다요. 당장 밭을 갈아야 하는데 밭을 갈 소가 없어졌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도둑질하는 놈들도 참으로 죽일 놈이지만 선량한 백성을 도둑으로 만드는 나라님들이 더 원망스럽구먼요.”
한 사람이 읍하고 사정을 얘기하면 앞뒤 할 것 없이 사람들이 첨언을 하며 그간의 폭정에 시달린 사정을 얘기했다. 이성도 그들의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어명을 받고 암행으로 전국을 떠돌다 보면 흉가가 되어버린 집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도망치는 사람들은 죽을 각오를 한 사람들이란 걸 이성도 익히 알고 있었다. 백성들이 수탈당하는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정말 이들을 구제해줄 군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했다. 부정한 세금 수탈과 노역 징수만 사라지더라도 살던 집을 버리고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백성들의 분노가 극에 달한 것 같았다. 위기감이 감도는 삶의 모습을 언제까지 지나치거나 묵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