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익숙해지자 캄캄했던 산신각 내부의 탱화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보는 산신과 호랑이가 무서웠던 수양이 좀체 이성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서우냐?”
이성이 수양의 머리를 쓰다듬자, 이성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수양이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불이 꺼지는 바람에…….”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구나. 밤새 산신각에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비가 거세지자 이성이 몸을 일으켜 산신각 문을 닫았다.
“자리를 비운 게 발각이라도 되면 행수께서 그냥 넘어가시지 않을 텐데……. 어쩐담.”
“어쩌겠느냐. 비가 그친다고 하더라도 이 어둠 속에 길을 나섰다간 길을 잃고 헤맬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호랑이라도 마주치면 어찌할 것이냐!”
“호랑이라니요. 깊은 산중도 아니고 고작해야 작은 언덕 하나를 넘으면 될 일인데, 호랑이가 나타나려고요.”
“수양이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호랑이만 있는 줄 아느냐. 멧돼지도 밤이 되면 나오느니라. 언덕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밤이 되면 맹수들이 민가 근처까지 내려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느냐?”
이성이 수양을 놀릴 요량으로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린 꼼짝 않고 여기에 갇히는 건가요?”
“날이 밝을 때까지는 여기 있어야 할 듯하구나. 앞도 보이지 않는데 땅까지 질어져 낙상이라도 하면 큰일이니…….”
도무지 그치지 않을 것 같던 굵은 빗줄기는 밤이 깊어지자 조금씩 가늘어졌다. 비가 그친 어둠 속에서 부엉이 소리가 울려왔다. 간간이 깨어난 야생의 소리가 텅 빈 절 마당까지 들려올 때마다 밤이 조금씩 여물어갔다.
“옛날에는 혼기를 놓친 처녀, 총각들이 만복사를 찾아와 자기 짝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고 합니다.”
“재미있구나! 만복사가 그런 절이었다니. 지금도 배필을 만나게 해달라고 지성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이 있느냐?”
“그건 저도 모르옵니다.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그와 관련해서 전하는 이야기가 있지요. 만복사의 대웅전에서 부처님과 저포 놀이로 내기를 한 총각이 있었지요.”
“부처님께 내기를 걸었다고? 어떤 내기였느냐?”
“부처님이 지면 그 총각에게 아름다운 배필을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내기였지요.”
“총각이 지면 어떻게 하고?”
“법연을 차려 지성을 드린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총각은 두 번 저포를 던져 이기게 되고, 불상 밑에 숨어서 배필이 될 여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 그날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나 부처님 앞에 좋은 배필을 점지해 달라고 기도하지 뭡니까. 그날 총각은 이 여인과 정이 통해 하룻밤을 함께 지내게 되지요.”
“그래서 두 사람은 혼례를 치렀느냐?”
수양이 잠시 말을 멈추자 이성이 궁금한 듯 재촉했다.
“알고 봤더니 그 여인은 죽은 처녀의 환신이었지요. 두 사람의 인연은 하룻밤으로 끝났고, 총각은 평생 그녀를 잊지 못하고 슬픔에 젖어 살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허허, 거참 귀이하고 슬픈 이야기구나!”
수양이 이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게 참으로 귀이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면 남녀는 생사를 넘나들면서까지 사랑을 갈구하고, 비록 하룻밤의 인연이지만 평생 절개를 지킬 수 있는 여운을 남기니 말입니다.”
“그렇구나! 어떤 사랑은 생이 다하도록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할 수 있지. 마치 우리처럼 말이다.”
이성이 미소를 지으며 수양을 바라보았을 때 어둠 속에서 수양의 눈가가 반짝이는 걸 보았다.
“지금 우는 게냐?”
“도련님도 그 총각처럼 저를 평생 잊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겠는지요.”
“그걸 말이라고……. 게다가 우린 쇠털 같은 날을 함께 보내게 될 것이니…….”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이성을 수양은 물끄러미 바라볼 뿐 말을 잊지 않았다. 산신각의 탱화가 어둠 속에서 벗어나 산신과 호랑이가 선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스며든 어스름에 수양의 젖은 눈빛과 슬픈 얼굴이 서늘히 드러났다.
그날의 맹세가 얼마나 허망했던 가를 생각하며 이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괴로워했다. 여진이 이성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왕 한기태를 잡아들이셨으니, 수양의 절개를 무참히 짓밟으려고 했던 죄를 함께 물어주시기 바라나이다.”
“행수는 아직 그대로 계시느냐?”
“네, 여전히 교방을 지키고 계시긴 하나, 기력이 예전 같지 않으셔서 자리를 물려주려고 준비 중이십니다.”
“그렇구나. 혹시 한기태의 행적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나 기록을 남긴 것이 있느냐?”
“네, 행수께서 수양을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연회에 쓴 비용과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면 되었다. 내 반드시 수양을 능욕한 죗값을 치를 수 있도록 조치할 것이다.”
여진이 돌아가자마자 이성이 서리를 불렀다.
“내 지금 관아로 갈 것이니 준비하라. 관아에 도착하는 즉시 이방과 형방을 추국청으로 불러오너라.”
이성은 서리에게 명령한 뒤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주막을 나섰다. 문을 열자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이성이 방을 나왔을 때 사람들이 모두 엎드려 절을 하였다. 저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암행어사가 출두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어사 나으리, 부디 억울한 사정을 들으시어 원한을 갚아 주소서.”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지나가는 행인들도 무슨 구경거리라도 있는가 싶어 기웃거리는 바람에 주막 입구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당황한 이성이 어찌할 줄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지금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은 내일 관아로 찾아와 고하도록 하시오. 시일이 걸리더라도 내 친히 그 사연을 듣고 조치하도록 하겠소.”
이성이 말을 마치자 주막 주변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이 길을 터주었다. 옆으로 비켜서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 나오면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살폈다. 하나같이 낡고 비루한 옷을 걸치고 있었고 낯빛이 창백했다. 줄줄이 아이들을 달고 나와 하염없이 울고 있는 여인도 보였다. 이성은 틀림없이 지아비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거라고 짐작하며 주막을 빠져나왔다. 관아에 도착하자 역졸과 함께 서리가 이방과 형방을 이성 앞으로 데려왔다. 이성이 취조를 시작했다.
“이방과 형방은 들으라. 사또가 관기를 불러 수청을 강요한 사실이 있느냐?”
이성이 거두절미하고 질문을 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좀체 입을 떼지 못했다. 이성이 불같이 화를 냈다.
“내 아는 바가 있어 묻는 말이니, 거짓 없이 샅샅이 고하라. 만에 하나 숨기거나 거짓 진술을 한다면 사또의 부정과 비리를 묵과하고 동조한 죄를 빠짐없이 물을 것임은 물론 다시는 관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성의 호령에 이방과 형방이 머리를 조아렸다.
“어사 나으리, 저희가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사또께서 교방을 수시로 드나들며 관기들을 사사로이 불러들인 날이 많았습죠.”
눈치 빠른 이방이 먼저 입을 떼자 옆에 있던 형방이 이방을 흘낏 쳐다보더니 이에 질세라 말을 가로챘다.
“관기 중에 수양이라는 예기가 있었나이다. 사또가 그 아이를 딱 찍어서 수청을 들라고 강요한 일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수양이라는 기생이 수청을 거부하고 끝까지 버티면서 옥고를 치르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형방의 입에서 수양이 거론되자 이성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수양이란 기생, 목숨을 걸더이다. 저러다 죽으면 어쩌나 싶은 정도로 심한 고문에도 끄덕하지 않았지요. 남원에서 이름난 기생인지라 교방에서도 어떻게든 구하려고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그 덕에 풀려나긴 하였으나 지금은 소식이 묘연하다 들었습니다.”
이성이 흥분하여 당장이라도 한기태를 불러 곤장을 치고 싶었으나 두 주먹에 힘을 주며 분을 누르고 있을 때 형방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기생이 물건은 물건이었습죠.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사또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하더이다. ‘성종 임금께서는 어우동이란 여인의 문란함을 이유로 사형을 집행하여 풍속을 바로 잡고자 했나이다. 하온데 어찌하여 사또께서는 절개를 지켜 수청을 거두어 달라는 소녀를 벌하나이까. 나라에서도 여성의 음란함을 경계하온데, 나는 음란하지 않아 벌을 받고 있나이다.*’라고 했습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