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이 좌중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노인이 지팡이로 땅을 더듬으며 사람들을 해치고 나왔다. 마치 송장이 걸어 나오는 것처럼 섬뜩했다. 사람들이 노인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어사 나으리, 저는 자식도 아내도 없이 혼자 사는 미천한 노인이 온대. 호적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나이다. 고을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에게 양곡을 나눠줄 때면 구호자 명단에 없다는 이유로 양곡을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하였습죠. 관아에 찾아가 그 사정을 얘기했는데도 제 사정을 살펴 주기는 커녕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나마 마을 사람들이 홀로 사는 노인을 불쌍히 여겨 동양을 해가며 연명하였습니다만 올해는 흉년이 유독 심해서 어디 가서 곡식을 빌릴 데도 없고, 인심이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곡기를 끊은 지 몇 날 며칠인지 셀 수도 없으니, 곧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고을에 사정이 같은 사람들이 또 있는가?”
살이라곤 남아 있지 않아 뼈가 앙상히 드러난 소경을 측은히 바라보던 이성이 물었다.
“예, 나으리, 소인처럼 죽지도 못하고 유령처럼 혼자 사는 노인이 한둘이 아니옵니다. 기근에 양곡을 받지 못하고 굶어 죽은 사람들도 여럿 있습죠.”
“진휼곡은 가구마다 나눠주는 것인데, 비록 대상자 명단에 없다 하더라도 실 거주자를 확인하여 소외되는 자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인즉. 구호 대상자 명단에 그대처럼 누락된 자들을 조사하여 이름을 올리도록 조치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 있게.”
앞이 보이지 않는 노인이 흙 마당에 이마가 닿게 엎드려 절을 올렸다.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도 자기 일인 양 함께 기뻐하며 눈물을 훔쳤다. 이성이 수행원들을 불러 부당하게 징수한 세금과 군포의 내역도 모두 조사한 뒤 피해를 본 민가에 돌려주라 일렀다. 말을 끝낸 이성이 일어나려고 하자, 몸이 휘청였다. 옆에 서 있던 서리와 수행원들이 달려와 이성을 부축했다.
“이럴 것 없네. 오랫동안 앉아 있다 보니 잠시 어지러운 것뿐이니…….”
사람들을 물리치고 몇 걸음 겨우 내딛던 이성이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사람들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오고, 우왕좌왕하는 발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다가, 순간 불이 꺼진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성이 눈을 떴을 땐 아무도 없는 방안이었다. 핏기없는 얼굴에 입술이 바싹 말라버린 이성이 주위를 살폈다. 단정하게 정리된 방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간 암행을 하며 기거하던 주막이나 민가에선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이 느껴졌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휴식인지 몰랐다.
날이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는 밤 민가에 문을 두드리면 받아주는 이가 드물었다. 거절하는 주인장을 설득하여 겨우 들어간 곳에서 병자와 한방에서 잠을 청한 날도 많았다. 그런 날은 밤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밤새 변을 대여섯 번씩 싸는 복통을 앓고 있는 아이가 있는 집도 있었는데, 변 냄새가 진동하여 한 방에 있기가 괴로웠다. 벼룩이 득실거려 옷을 털어도 모두 떨어지지 않아 포기하고 벌레에게 살을 뜯기며 밤을 보기도 했다. 먹고 살기 넉넉해 보이는 집들은 오히려 인심이 인색하여 문을 열어주는 이조차 드물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에 취해 있던 이성이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을 때 밖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으리, 일어나셨는지요.”
밖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에헴…….”
이성이 헛기침을 하자 문이 열렸다. 여진이 미음을 들고 들어왔다.
“나으리, 몸은 좀 어떠신지요?”
“여기가 어디냐?”
“교방이 옵니다.”
여진이 인사한 뒤 한쪽 무릎에 두 손을 포개어 앉으며 답했다.
“내가 어찌 여기에 있느냐?”
“마침 나으리께서 쓰러지신 그 자리에 행수가 계신 바람에 이곳으로 모시고 오셨습니다. 행수께서 고을에서 이름난 의원을 모시고 오셨나이다. 의원께서 큰 병은 아니고 오랜 기간 무리하여 기력이 약해진 탓이라 하였습니다.”
“행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시냐?”
“몸을 추스르신 후에 뵙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출타 중이십니다.”
“그래 내가 여기서 얼마나 누워 있었느냐?”
“이틀이 지났나이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느냐?”
여진에게서 이틀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자 허기가 밀려들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여 기갈이 밀려들 것입니다. 미음으로 속을 달래소서.”
이성이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미음을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미지근한 미음이 빈속을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의원께서 아직 무리하면 안 된다고 하셨으니, 당분간은 부드러운 음식을 먹고 충분히 주무셔야 기운을 회복한다고 하셨나이다.”
미음 한 공기를 다 비우는 동안 여진이 곁을 지키고 있다가 상을 들고 나갔다. 홀로 남겨진 이성이 다시 한번 방안을 둘러보았다. 언제가 보았던 방처럼 눈에 익었다. 나비 장식의 가구와 화조도가 그려진 작은 병풍이 눈으로 들어왔다. 이 방은 이성이 처음 교방의 담을 넘던 날 수양과 함께 밤을 보낸 곳임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머물던 방에 홀로 남아 있으니 수양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졌다. 이틀 동안 웃자란 수염 사이로 보이는 이성의 튼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며 수양을 불렀다.
“수양아, 내 웬일로 잠자리가 이리 편안한가 했더니, 수양이 너였구나! 수양이 네가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였구나! 내게 할 말이 있어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이야. 제발 꿈에서라도 좋으니 네 모습을 보여주려무나.”
아직 기력이 온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성이 수양의 이름을 부르다가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다시 눈을 떴을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리가 들어와 그간의 수행 상황을 보고했다.
“기민들에게 양곡을 지급한 내역을 보니 그 불공평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나이다.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는 구호 대상자 명부에서 누락되어 있었고, 권세 있는 양반이나 부호들이 구호 대상 명단에 들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전 부사 박이중의 노비와 전 좌수 이수광의 노비 수십 명이 구호 대상자 중에 끼어 있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파도 파도 부조리가 끊이지 않구나! 그간 잘못 지급된 양곡을 다시 거둬들이고, 구호 대상명부에서 누락된 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 그간 부당하게 양곡을 받은 자들에게 추세는 물론이고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정신을 잃는 바람에 얻은 이틀간의 호사도 이제 끝인 것 같았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밀려드니 더는 수양의 방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외출에서 돌아온 행수가 때를 기다려 이성을 뵙길 청했다. 이성은 곧 떠날 마음에 옷을 갖춰 입고 행수를 맞이했다.
“이 몸으로 어딜 가시려고 채비를 하셨는지요.”
방으로 들어온 행수가 말했다.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호사는 여기서 마쳐야 할 것 같소이다. 행수의 배려로 내 오랜만에 여독을 풀었소.”
“별말씀을요. 안 그래도 찾아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 사람들 사이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헌데 하도 기구한 사연을 들고 찾아온 사람들이 많은지라 감히 나서지 못하고 돌아가려 하는 찰나에 나으리께서 변고를 당하셨지 뭡니까. 청에 몸을 뉠 곳이 마땅치 않아 마침 교방이 가까우니 제가 모시겠다고 나섰나이다.”
“고마우이, 내 그대 은혜를 잊지 않겠네.”
이성이 인사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고 하자 행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나으리 제가 드리고 싶었던 사연을 말씀드려도 되겠나이까?”
나이가 지긋이 들었지만 늙었다는 느낌보다 단단한 사람으로 다져진 분위기를 풍겼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행수의 말을 듣고 가야 할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듣고 가지 않으면 계속 궁금하고 신경 쓰일 게 분명했다. 오늘은 긴 밤이 될 것임을 직감하며 이성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서 암행 일기> 중 서계 내용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