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수양을 찾겠노라는 약속이 그 옛날 수양을 앞에 두고 하던 약속처럼 허망한 말이 되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달빛 아래서도 복사꽃 같은 얼굴이 환하게 빛나던 수양을 떠올리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도련님, 저는 비록 기생이지만 꿈이 있나이다.”
이성이 교방의 담을 넘어 수양의 방으로 들었던 날 수양은 어떤 다짐처럼 이성을 향해 자신의 꿈 이야기를 했다.
“꿈이라, 그래 꿈이 무엇이오?”
이성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무희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팔도에서 춤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을 거두어 예인들을 길러내는 것이지요.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잠시 말을 멈춘 수양에게로 한 뼘 몸을 기울이며 다음 말을 부추겼다.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구려. 그런 단단한 꿈을 품고 있다니 놀랍소.”
이성은 수양이 쉽게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가녀리고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던 여인의 마음에 단단히 자리 잡은 꿈의 고백이 마치 자신을 향한 고백처럼 황홀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누군가를 정인으로 맞아들이게 되면 오래도록 품어온 꿈이 포말처럼 부서져 버릴까…….”
“그렇지 않을 것이오. 나는 그대의 꿈을 지켜주리다. 적어도 내 곁에서만은 그대의 꿈이 부서지지 않도록 하겠소.”
이성이 망설이는 수양의 말끝을 잡았다. 수양의 마음에 걸어둔 빗장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어쩜 내게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왔을까.’
순간 수양은 이성이 하늘에서 맺어준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인연이 될 것이란 두려움으로 그를 내칠까도 생각했다. 이성을 만나러 나오는 길에 수양은 몇 번이고 발걸음을 돌릴까 망설였다. 길을 밝히기 위해 한발 앞서 걷는 동희의 손에 들린 청사초롱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수양의 마음이 흔들렸다.
“편지를 받는 순간 도련님의 마음이 결코 가벼운 마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지요. 사실 편지를 받고 소녀 또한 널뛰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웠습니다. 도련님과 저는 몇 번 마주치지도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수양이 더는 내외하지 않고 마음을 드러냈다.
“내가 그대를 광한루에서 처음 본날 그대 꿈을 꾸었소. 나는 본디 꿈을 잘 꾸지 않는 사람인데, 그대 생각을 너무해서 그랬는지 꿈을 다 꿨지 뭐요. 그대는 선녀의 옷을 입고 있었고 나는 구름 위를 걸어 그대에게로 가더이다. 꿈속이지만 그대를 만나 나누던 정이 어찌나 애틋했는지 잠을 깨고나서도 한동안 아득한 마음이 들었소.”
“꿈에서처럼 우리는 이미 하늘에서 만난 인연일까요?”
수양이 이성의 꿈 이야기를 진심으로 새겨듣곤 물었다. 이성이 어린아이를 대하듯 부드럽게웃으며 대답했다.
“그대는 필시 선녀였을 것이고 나는 아마도 비를 관장하는 적송자였을지 모르오. 구름 위를 편안하게 걸어다닌 걸 보면 말이오. 천상에서 못다한 정이 남아 이렇듯 인간세계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 아니겠소.”
이성의 능청스런 이야기에 수양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성이 흡족하여 수양을 끌어당겼다. 둘은 마치 억겁의 세월을 거슬러 천상의 선녀와 적송자가 되어 회포를 푸는 듯하였다. 몸은 땅을 딛고 있으나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으니, 그 황홀함은 진정 천상의 것이었다.
행수와 이야기를 끝내고 이성이 방을 나왔을 때 문밖에는 여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덧 동이 틀려는지 동쪽 먼 곳으로부터 푸르스름한 빛이 번져나왔다. 수양의 방을 나와 교방의 담벼락에 잠든 웅삼을 깨우던 날이 떠올라 이성의 얼굴에 아련히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나으리, 며칠 더 몸을 추스르고 가시면 좋을 텐데……. 이 몸으로 먼 길을 어찌 가시렵니까.”
밤새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단정한 모습의 여진이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공손히 말했다.
“내 이 신세는 잊지 않겠네. 자네들 덕으로 몸을 추스르고 가네.”
“부디 강녕하시어요.”
여진이 더는 잡을 수 없음을 알고 하직 인사를 올렸다. 여진이 단정하게 묶어둔 보자기를 내밀었다.
“행수께서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먼 길 가시다가 요기라도 하시라고 말린 음식과 다과를 담았습니다.”
이번엔 이성도 거절할 수 없어 아무 말 없이 받아들었다. 보자기의 크기에 비해 제법 묵직한 무게였다. 교방을 나섰을 때 서리가 말을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내 긴히 알아볼 것이 있어 전주로 가 있을 것이니 이곳의 조사가 끝나는 대로 수행원들과 함께 객사로 오라.”
말에 올라탄 이성이 서리에게 말했다.
“나으리 혼자 괜찮으시겠습니까?”
“며칠 잠에 취해 누워 있었더니 몇 달간의 여독이 모두 풀린 듯하구나. 내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으니 더는 지체하지 않으려 한다.”
이성이 말을 끝내자마자 말을 재촉했다. 도포 자락을 날리며 말을 타고 달리는 이성의 모습이 여명 속으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