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이 방으로 들어오자 이성이 작성하던 서계를 보이지 않게 정리했다.
“앉으시게.”
이성의 말이 떨어지자 큰절을 올린 뒤 자리에 앉았다.
“그간 옥체 평안하셨는지요."
“보시다시피……, 누더기를 걸치고 떠도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살고 있네만…….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왔는가?”
“이미 저자에 암행어사가 출두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나이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라 낯선 사람이 오면 금세 표가 날 수밖에 없지요. 게다가 관아 인근에 묵을 수 있는 주막이 몇 개나 되겠습니까.”
“아! 그럴 만도 하지. 어찌 소문이 나지 않았겠나. 그 난리가 났는데도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한 일이지. 이번엔 하필 잔칫날 일을 벌였으니……. 그건 그렇고 여진이 자네가 나를 찾아온 연유라도 있는 겐가?”
“나으리,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내 어찌 네 이름을 잊을 수 있겠느냐? 수양과 그토록 각별한 사이였는데…….”
이성은 수양을 친언니처럼 챙기던 어린 시절의 여진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남몰래 교방을 드나들며 수양을 만날 때면 여진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곤 했다.
“안 그래도 수양이 소식을 전하러 왔나이다.”
“수양이 소식? 그래 지금 수양은 어디에 있느냐?”
이성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다급히 물었다.
“송구하옵니다. 지금 수양이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모르옵니다. 그게…….”
여진이 선뜻 말을 잇지 못하자, 이성이 답답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그럼 수양이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내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남원부터 찾았거늘 수양은 온데간데없고……. 소식 한 점 들을 수 없었으니…….”
“나으리께서 오셨을 때는 행수가 함구하라 했나이다. 그게 수양이를 위한 일이라면서…….”
여진의 두 눈에서 동시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어서 말해 보아라. 내 한시도 수양을 잊은 적 없느니!”
“나으리께서 남원으로 오시기 전에 한기태가 사또로 부임했습니다. 이미 호색한으로 소문이 자자하여 교방에서도 피해를 입을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수양을 점찍고는 수청을 강요했습니다. 수양이가 사또의 수청을 수락할 리가 있었겠습니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교방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툭 하면 예기들을 불러 사적인 자리에서 술을 따르게 하고 폭행을 일삼았지요. 행수가 예기들은 사사로이 술자리에 부르면 안 된다고 누누이 얘기했지만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예기들은 기량을 닦기 위해 꾸준히 수련하지 않으면 금세 표가 나기 마련이지요. 남원의 예기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의 기량을 자랑했는데 한기태가 부임하고부터 교방이 쌓아놓은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수양은 어찌 되었단 말이냐?”
“수양이는 남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양이……, 어떻게, 어디로 말이더냐?”
“교방에서도 수양이 불편한 존재가 되었지요. 예기들 사이에서도 미움을 받고 고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청을 거부하면 할수록 교방을 지속적으로 건드렸으니까요. 하지만 행수가 수양에게 수청을 들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수양만한 인재가 없다며 어여삐 여기셨지요. 하지만 행수가 보호해 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수양이는 사또의 수청을 거부한 죄로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매질을 하고 주리를 틀었는지…….”
“한기태, 내 이놈을…….”
이성이 주먹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다 죽어가는 수양이를 끄집어내려고 행수가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사또와 관리들을 교방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시중에 나와 있는 진기한 물건들을 구해다가 바치셨지요. 그 덕으로 수양이 겨우 풀려났지만, 행수는 사또가 다시 수양을 괴롭힐 것이 틀림없다며 남원을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몸도 다 추스르기 전에 관리에게 뇌물을 써서 남원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럼 수양은 어디로 간 게냐?”
“행수께서는 전주로 보내려고 했는데, 그게 부탁하는 쪽에서 원한다고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일단 구례로 갔다가 여건을 봐서 전주로 보내겠노라 약속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연락이 끊어졌나이다.”
“그렇다면 구례와 전주로 연통을 넣어보면 될 일 아니냐.”
이성의 입술이 그사이 바싹 말라버렸다.
“행수께서 구례고 전주고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수양이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관기 팔자가 기구하여 어디로 흘러 들어갔는지……. 그때는 수양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여진이 말을 멈추고 턱까지 흘러내린 눈물을 훔쳤다.
“모두 내 불찰이다. 내가 좀 더 일찍 수양을 데리러 왔어야 했건만……”
일그러진 이성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성을 만나고 난 뒤부터 수양은 시간만 나면 만복사를 찾곤 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복사에 만나는 날도 있었다. 만복사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날이 떠올랐다.
“부처님께 무슨 소원을 빌었느냐?”
탑돌이를 하고 있는 수양에게 다가온 이성이 물었다.
“소원은 입 밖으로 내면 안 되는 법입니다. 지성을 드리려면 가슴 속에 꼭 품고 있어야 하는 게지요.”
탑돌이를 하느라 볼이 복숭아처럼 붉어진 수양을 이성이 웃으며 바라봤다.
“네가 말 안 해도 알 것 같구나!”
“도련님께서 소녀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수양이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네 마음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느냐. 나랑 백년해로하게 해달라고 빈 것 아니냐?”
이성이 몸을 숙여 수양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가 눈을 맞췄다.
“어머 망측해라.”
수양이 얼굴을 더욱 붉히며 이성의 눈을 피했다. 이성이 큰 소리로 웃으며 수양의 두 볼을 감싸 쥐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게냐? 얼굴이 왜 이토록 붉은 것이냐?”
수양이 이성을 째려보며 몸을 돌렸다.
“나도 원이 하나 있느니, 너와 함께 탑돌이를 하러 종종 와야겠구나.”
이성이 말을 끝내고, 탑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그런 이성을 수양이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한 발치 뒤에서 걷기 시작했다. 탑 주위가 푸르스름한 으스름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탑돌이를 끝내고 돌아가려고 할 때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두 사람은 산신각으로 몸을 피했다. 급히 들어선 산식각은 조용하다 못해 괴괴했다. 비 내리는 으스름 저녁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날은 어둡고,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구나!”
이성이 산신각 밖을 내다보다가 수양을 바라봤다. 수양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했다. 그때 거센 바람 자락이 산신각 안으로 불어 들었다. 두 개의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수양이 겁을 먹고 이성의 품으로 들어왔다.
“이거 낭패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