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태가 같잖은 표정으로 이성을 쏘아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선비가 뉘신지 궁금한 모양이오. 어디 사시는 뉘시온지?”
이성이 수저를 내려놓고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음식 냄새와 풍악 소리가 관아의 담을 넘어 성문 밖까지 진동하더이다. 이곳저곳 떠돌면서 잔치 있는 곳이 있으면 들어가 끼니를 때우는 선비에 불과하니 얼른 먹고 일어나겠소.”
“그렇다면 거지와 다를 게 없다, 그 말이구려. 허허. 갓에 도포까지 갖춘 걸 보니 양반은 양반인 모양인데……. 내 그대에게 체면 살릴 기회를 줄 테니 시나 한 구절 읊어보시오. 밥값이라 생각하고!”
부채로 얼굴을 가린 이성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성이 한기태의 거드름 피우는 모양이 꼴사나웠지만, 자정이 넘으면 오랏줄에 묶이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임을 생각하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놈 잘 논다. 감히 내게 시를 운운했겠다!’
“내 오늘 잔치 풍경을 보니, 떠오르는 시상이 있어 한 소절 읊어보리다.”
금동이의 좋은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옥소반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아라
시를 읊은 이성이 부채를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밥값도 했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소. 한 상 잘 얻어먹고 갑니다.”
좌중이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성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날랜 걸음으로 관아 문을 열고 나갔을 때였다.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두리번거렸다. 곧 들이닥칠 일을 감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구례 현감이 제일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부모님 병안이 깊어 먼저 일어나야겠소이다.”
구례 현감이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고 나가자 눈치를 보고 있던 벼슬아치들이 꽁무니를 빼며 달아났다. 이미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장수 현감이 분위기를 읽지 못한 채 풍악을 울리라고 소리쳤다.
“잔칫집 분위기가 장례식장처럼 왜 이리 조용한 거요. 다시 풍악을 울리고……, 여기, 술 좀 더 내오너라!”
악공들이 눈치를 살피다가 연주를 시작했다. 다시 가야금과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기태가 양미간을 찌푸린 채 순식간에 썰렁하게 비어버린 잔치 마당을 응시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거지꼴을 한 선비가 부채를 거두었을 때 드러난 모습이 낯이 익었다. 선뜻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은 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넋을 놓고 있는 노모를 먼저 챙겼다.
“어머님, 일단 자리를 옮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한기태가 급하게 이방을 찾아 가마를 준비하라 일렀다. 이방 역시 영문을 모른 채 사또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급히 뛰어다니고 있을 때였다.
“암행어사 출두요!”
우렁찬 외침과 함께 역졸들이 관아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관아 안에 있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급하게 도망치느라 잔칫상이 엎어지고, 사람들은 넘어지고 뒹굴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관아의 문이 닫히고 사람들이 꼼짝없이 갇히게 되었다. 뒷문으로 빠져나가려던 한기태도 오랏줄에 묶인 채로 성이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방, 호방, 형방 등 육방들까지 모두 순식간에 잡아들였다. 끌려온 관리 중에는 도망치다가 넘어지고 부딪혀 다치거나 역졸들에게 저항하다가 입술이 터지고 피를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남원 부사를 지내면서 온갖 악행과 비리를 저지르며, 개인적인 부를 축적한 죄가 있어 알아보라는 어명을 받았느니. 이 시간 이후로 관아의 창고를 봉쇄하고 모든 장부와 공문서를 조사할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비리와 관련 증거가 나오면 그 죄를 면치 못할 것이니, 먼저 이실직고하는 자는 정상 참작할 것이다. 죄인들은 그간의 죄를 미리 고하라. 만약 거짓 고함과 추가의 비리와 악행이 밝혀지면 중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성이성이 추국청 중앙에 서서 오랏줄에 묶인 한기태와 육방을 향해 말했다. 그때까지도 한기태는 성이성을 알아보지 못한 채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무고한 사람을 이리 붙잡아 두는 게 어디 있습니까. 어머님 생신날 부모 앞에서 자식을 이리 욕보이게 하다니 후한이 두렵지 않소! 내 오늘의 치욕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한기태 저놈이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길길이 날뛰는구나. 한심한 놈, 어디 할 수 있다면 힘이 닿는 데까지 용을 써 보아라. 너의 뒷배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임금 아래인 것을…….’
이성이 여전히 기가 꺾이지 않은 채 소리를 치는 한기태를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호령했다.
“세상이 다 아는 너의 죄를 네가 모르느냐! 너의 악행과 비리가 소문을 타고 궁궐을 넘었느니. 이쯤 되면 그간의 죄를 반성하고 죽을죄를 졌다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거짓을 고하면 형량이 늘어남을 진정 모른단 말이냐.”
바로 그때 한기태가 어떤 생각이 떠오른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 이성을 바라봤다.
“아니, 너는…….”
“그래 이제야 내가 누군지 떠올랐느냐.”
“성이성!”
성균관 시절 색장으로 있으면서 한기태의 문란한 생활을 상부로 보고한 성이성을 기억해 내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놈이 기어코 여기까지 쫓아왔구나!’
한기태가 하늘이 무너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내 기필코 너의 비리와 악행을 샅샅이 뒤져내어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할 것이니.”
옆에서 몸을 떨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육방들이 눈치를 살폈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망연자실해 있는 한기태를 바라보던 이방이 먼저 나섰다.
“어사 나으리 저는 사또께서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내 모든 죄를 이실직고할 터이니 이 불쌍한 소인의 죄를 감하여 주소서.”
한기태가 이방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뭐라고 이놈! 내가 이곳으로 부임해 오긴 전부터 실세 역할을 하고 있었던 놈이 뭐가 어쩌고 어째?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여기가 어디라고 고함을 치고 있느냐. 진정 취조의 엄중함을 모르고 함부로 나대느냐. 여봐라, 죄인 한기태를 옥에 가둬라.”
이성의 명령이 떨어지자 역졸 두 명이 한기태를 끌고 나갔다. 한기태가 끌려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육방들이 차례로 사또의 죄를 고해바치기 시작했다. 따로 문서를 조사하지 않아도 그의 죄가 줄줄이 꾀어져 나왔다. '이 정도면 삼대가 쌓은 공도 무너지겠군. 이참에 아예 묻어버리든지 해야지. 징글징글한 놈!'
취조를 끝낸 이성이 인근 주막에서 서계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선비님, 웬 아녀자가 찾아왔습니다. 지금 좀 뵙고자 하는데요.”
문 앞에서 주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성이 붓을 내려놓고, 문을 열어 보았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여인이 얼굴을 드러내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으리,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만면에 웃음을 띤 이성이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서 들어오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