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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Sep 29. 2024

연인

  빗방울이 연못에 닿자마자 작은 동심원이 소리도 없이 번져나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늙은 소나무 아래 누각을 향해 내달렸다.   


  “지나가는 비일 것이오.”


  누각 안으로 들어선 이성이 수양을 보며 말했다. 젖은 저고리에 속살이 비췄다. 이성의 시선을 의식한 수양이 젓은 장옷으로 어깨를 가렸다. 요란해진 빗줄기가 장막이 되자 둘만을 위한 장소로 들어선 것 같았다. 수양의 몸에서 희미하게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아직 봄기운이 많이 찬 모양이오. 비에 젖은 채로 괜찮겠소?”


  이성이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도련님 어깨 위로 김이 피어오릅니다.”


  “그대 몸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그치자 적막 속에 비 듣는 소리가 유난히 두드러졌다. 깨어난 감각들이 잠시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정자 안으로 향긋한 내음이 진동했다. 숲에서 풍겨오는 내음인지 수양의 향기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비에 젓은 자연과 수양이 풍겨대는 향기가 한데 섞여 이성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성이 수양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수양이 피하지 않고 이성을 바라봤다. 수양이 눈을 감았을 때 이성이 입술을 포개었다. 요란스레 파문이 일던 호수의 표면이 잔잔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가늘어진 봄비에 톡톡 일정한 간격의 동그라미가 끝도 없이 번져나가다가 희미해졌다. 비가 그치자 정자가 훤하게 드러나고, 한데 얽힌 두 사람의 몸에서는 누구 것인지 모를 수증기가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올랐다.


  “수양!”


  “네, 도련님.”


  “내 그대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소.”


  “말씀 편하게 하시어요.”


  이성의 품에서 몸을 빼며 수양이 말했다.


  “수양아!”


  “풋! 왜 그리 어색하신지요.”


  수양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여인의 이름을 불러보는 게 처음이라 그런가 보오.”


  “말씀 편하게 하시래도요. 제가 도련님의 첫 여인입니까?”


  “그럼. 첫 여인이고 말고. 나를 아주 혼미하게 만드는 연인이지.”


  “혼미하게 만드는 건 오히려 도련님입니다. 야밤에 담을 넘지 않나……, 눈만 마주치면 고백을 하시질 않나.”


  교방의 담을 넘던 그날의 설레임이 다시 밀려왔다. 장옷을 벗고 드러난 수양의 얼굴을 가까이서 대면하던 그날 숨이 막힐 것 같은 황홀한 순간을 다시금 마주한 것 같았다. 자신의 방안까지 이성을 데려와서도 도도하고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았던 수양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날 이성은 자신의 모든 걸 걸고서라도 이 여인을 지켜내리라 다짐했다.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제가 놀리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담을 넘어온다고 한들 제가 아무에게나 마음을 줬을 리도 없을뿐더러, 소녀 또한 어찌하여 도련님께 이리 마음을 빼앗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수양이 말을 멈추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성이 미소를 머금고 수양을 바라봤다.


  “그게 다 인연인 것이지.”


  “인연이라…….”


  수양이 생각에 잠긴 듯 말을 흐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기생에게 인연이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기생이라고 인연이 없겠느냐.”


  “관에 매인 몸으로 인연이 닿았다 한들 마음 가는 대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게 겁이 나느냐?”


  “네, 늘 그것 때문에 겁이 납니다.”


  수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너를 내 여자로 만들 것이다.”


  “도련님께서 무슨 수로……, 무슨 힘이 있어…….”


  “수양아, 내 너를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니. 근심일랑 하지 말아라.”


  “진정 도련님을 믿어도 되겠는지요?”


  “그럼, 내 가벼이 하는 말이 아니니. 하루라도 빨리 벼슬길로 나가 내 너를 데려갈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도련님께서도 이 남원을 떠나실 게 아닙니까!”


  “과거 시험을 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렇게 떠난 사내들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변에서 어떤 사내들을 보아왔는지 내 짐작이 간다마는, 나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니. 안심하거라.”


  “도련님, 그런 맹세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아십니까? 모두 도련님과 같이 내 꼭 너를 데려 가마 하고 떠나시곤 연락이 두절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기생 중에는 오매불망 정인을 기다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을 찾아주지도 않는 선비가 죽었다는 비보에 바보처럼 따라 죽는 경우도 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허나 수양아, 너는 나를 믿어도 좋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이성의 말이 끝나자 수양이 이성의 품에 안겼다. 수양의 가녀린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성이 다시 한번 수양을 꽉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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