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앞으로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에 되새겼다. 자신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 스승을 경외하는 마음도 한층 깊어지는 듯했다. 스승이 돌아가고 홀로 남은 이성의 마음에 잔열이 좀체 식지 않았다. 후드득 봄비가 듣기 시작했다. 곡우절이 다가오니 거짓말처럼 비가 잦아졌다. 툇마루로 나가 처마에 맺혔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수양을 떠올렸다. 가슴을 데우는 것이 충의인지 그리움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립다고 아무 때나 찾아가서 만날 수 있는 여인이 아니라는 생각에 먹먹함이 밀려왔다. 곡우절 행사가 있는 날 어수선한 틈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이성은 머릿속으로 수백 번은 더 교방의 담을 넘고 있었다.
“도련님, 어찌 처마 밑에 떨어지는 물방울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계십니까?”
툇마루에 서서 봄비를 바라보는 이성에게 웅삼이 말했다.
“내 잠시 생각에 잠기다 보니, 네가 들어오는 기척을 듣지 못한 모양이구나.”
“수양을 생각하고 계셨습니까요.”
웅삼이 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놈이, 느닷없이 그게 무슨 말이냐!”
이성이 과하게 큰소리로 호통쳤다.
“툇마루에 서서 넋을 놓고 계시니 하는 말씀입니다요. 사람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고 계시니…….”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느냐?”
“한참 되었습니다요. 도련님 모습이 하도 애달파서 제가 말을 걸 수가 있어야 말이죠.”
“쓸데없는 소리는. 그래 무슨 일이냐?”
“사또께서 잠시 후에 이리로 오신다고 하셨으니 어디 가지 말고 사랑에 계시라고 하셨습니다요.”
“그래, 알겠다.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요즘 외출이 잦으신 것 같다면서, 어디를 그렇게 다니냐고 물으셨습니다.”
“내가 뭘 얼마나 돌아다녔다고 그러실까. 그래 너는 뭐라고 했느냐?”
“환절기를 타시는지 몸이 자꾸만 처진다고 하시면서 가까운 산으로 등정을 가시곤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요.”
“잘했다.”
“물론 사또께서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시지는 않는 눈치입니다요.”
“알겠다, 알겠어. 웬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 아버님보다 네 잔소리가 더 심하구나!”
“그게 다 도련님 걱정해서 드리는 말씀이지 뭡니까요. 아무튼, 요즘 도련님을 주시하고 계신 것 같으니 신경을 쓰시라 이 말씀입니다요.”
“네가 아버님께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한 것은 아니렷다.”
“제가 무슨 소리를 했겠습니까. 저는 늘, 항상 도련님께서 혹시나 책 잡히실까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요.”
“그렇지, 웅삼이 너는 언제나 내 편이지.”
“그람요. 도련님 편이고 말고요. 그러니 사또께서 눈치채지 않게 제발 아무 데서나 그리 애달픈 표정으로 넋을 놓고 계시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요.”
“그래, 내 너의 충고 잊지 않으마!”
잠시 후 성 부사가 사랑으로 들어왔다. 몸종이 사랑채로 찻상을 가져왔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방안으로 차향이 은은히 번져나갔다.
“차향이 짙구나!”
성 부사가 노랗게 우러난 황차를 숙우에 따라 식히며 말했다.
“네, 비가 오니 향이 날아가지 않고 방안에 더 오래 머무는 것 같습니다.”
이성이 소매를 걷고 공손하게 숙우를 받쳐 들고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래 차 맛이 어떠냐?”
이성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삼키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좋습니다.”
“그래, 갓 따내어 볶은 잎 차보다는 조금 숙성을 시킨 차가 넘김이 부드럽지. 선비는 술보다 차를 가까이하며 마음에 찌꺼기가 쌓이지 않도록 마음을 수련해야 하느니라.”
“네, 아버님!”
“그래, 요즘 어떠냐?”
성 부사의 질문이 막연하여, 잠시 뜸을 들이던 이성이 대답했다.
“부쩍 날이 따뜻해져 뒷산에 오르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요 며칠 웅삼이를 데리고 산행을 다녔더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웅삼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변명을 겸해서 답했다.
“그래, 늘 방 안에서 책만 보는 서생이 되길 이 아비도 바라지는 않는다. 틈틈이 바깥 구경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모습도 살필 때가 되었지. 장차 벼슬에 나가 백성을 다스릴 때도 자주 백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느니라. 저자에 떠도는 말들이 비록 모두 사실은 아닐지라도, 민심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는 파악할 수 있지.”
“일전에 저자에서 임금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고 경도될 필요는 없느니. 그렇더라도 민심은 천심이란 것만 잊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네, 아버님.”
“그리고 내일 곡우절 행사에 같이 나가자꾸나. 곡우제가 거행될 것이다. 올해 농사가 풍년이 될 수 있도록 비를 잘 뿌려 달라고 지내는 제사이니, 너도 절을 올리면 좋겠구나!”
“네, 그리하겠습니다.”
“이번 행사가 끝나면 공부에 더욱 매진하도록 해라. 하루라도 빨리 성균관으로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 봄기운에 마음이 들뜨고 몸도 나른하여 자칫 해이해지기 쉬운 계절이지. 몸도 잘 돌보아야 하지만 더불어 마음의 중심도 잘 잡아야 하느니라.”
“네, 아버님!”
평소 성 부사답지 않게 당부의 말이 긴 것 같았다. 이성은 아버지에게 뭔가를 들킨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교방의 담을 넘은 걸 알고 계신 걸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아버님께서 어찌 알겠어. 웅삼이 이놈이 일러바치지 않은 이상 알 수가 없는 일이지. 웅삼이 다른 건 몰라도 의리 하나는 있는 놈이니까, 절대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야. 그래, 괜히 내가 제 발 저려서 하는 노파심이지, 그럼, 그럴 거야.’
이성이 속으로 여러 번 아닐 거라고 다짐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이 남았다.
곡우절을 맞아 아침부터 관아가 부산스러웠다. 성 부사가 의관을 갖추고 이성을 불렀다. 이성도 단장을 하고 성 부사를 따라 행사에 참여했다.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혹시 수양을 볼 수 있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오늘은 임금께서도 궁궐 밖으로 나와 친히 논에 들어가 경작하며 풍년을 기원하는 풍습이 있느니라. 이 아비도 오늘 농민들과 함께 경작하는 행사에 참여하려 하느니. 너도 함께 논밭으로 들어가 보겠느냐?”
“아닙니다. 훗날 저도 한 고을을 다스리게 되면 그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성이 당황한 기색으로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성 부사가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라. 목민관이 되면 농민들과 함께 매년 흙을 밟아야 할 것이니…….”
풍물놀이패가 행사의 시작을 알리자 행사 마당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풍물패들이 신나게 놀고 나간 자리에 기우제를 지내는 제사상이 차려졌다. 제사장이 축문을 읽고 성 부사가 향을 피워 절을 올렸다. 이성도 순서를 기다려 절을 올렸다. 행사장 뒤에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예기들이 장막 속에 몸을 숨긴 채 대기하고 있었다. 수양이가 장막 사이로 절을 올리는 이성을 발견하곤 미소를 머금었다. 옷을 갖춰 입고 제를 지내는 모습이 지난밤 담장을 넘어올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소쩍새 소리가 멀어지고 달빛이 창호지 사이로 비취던 밤이 떠올랐다. 수양이 장옷을 걷어내자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애송이 같은 소년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어느새 수양의 옆으로 기생들이 몰려와 사또 옆에 서 있는 이성을 구경했다.
“저분이 사또 자제시구나. 어쩜 저리 점잖고 기품이 흐른 담.”
“잘 자란 아들을 사람들 앞에 내놓고 싶으신 모양이야.”
“요즘 부쩍 행사에 데리고 자주 모습을 드러내시네. 혼사 들어오라고 일부러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나게 하시는 건 아닐까?”
“사또께서 뭐가 부족해 그러실까. 가만히 있어도 혼사는 알아서 들어올 텐데. 모르긴 해도 사돈 맺자고 하는 유수한 양반가의 처자들이 줄을 섰을 게야.”
기생들이 몰려들어 이성을 보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수양도 모르는 사실이 아니지만, 막상 그런 말들을 직접 들으니 의기소침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앞으로 어찌 될까. 관에 매인 기생의 신분으로 저런 유수한 양반 자제의 여자가 되는 일이 가당키나 할까.’ 이런 상심의 시간도 잠시 수양은 다른 기생들과 함께 행사 마당으로 나갔다. 가야금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아쟁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마당으로 기생들이 부채를 들고 나와 꽃과 나비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마당을 둘러싸고 기생들의 춤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한쪽에선 소를 잡아 음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행사 마당과 조금 떨어진 정자에서 성 부사와 함께 이성이 기생들의 춤을 지켜봤다. 이성의 시선이 수양을 따라 움직였다. 부채를 높이 치켜들고 빙그르르 도는 모습이 선녀 같았다. 보일 듯 말 듯 치맛단 아래로 보이는 발이 가볍게 허공으로 올랐다가 땅으로 내려왔다. 나비 같기도 하고 꽃잎이 휘날리는 것 같기도 한 춤사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부채춤 공연이 끝나자 성 부사는 밭을 가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이성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아무도 모르게 행사 마당을 빠져나왔다. 행사를 맞은 저자가 사람들도 붐볐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옷깃을 스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점점 풍악 소리가 희미해지고 사람들이 뜸해진 골목으로 들어서자 이성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마을 어귀의 장성을 지나 솔밭으로 들어서자 작은 연못이 나왔다. 멀리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보였다. 이성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여인의 뒤로 다가갔다. 뒤에서 슬금슬금 다가온 이성이 한 손으로 수양의 눈을 냉큼 가리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아시겠소.”
“어머나!”
수양이 한 발짝 물러나 뒤돌아서 이성을 보며 활짝 웃었다.
“어떻게 나보다 빨리 왔소?”
“곡우절 행사 때문에 모두 밖으로 나가는 날이라, 오후에는 교방에서도 따로 일정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랬구려! 낭자보다 빨리 오려고 서둘렀건만. 나보다 그대 마음이 더 급했나 봅니다, 그려!”
"왜 자꾸만 소녀를 놀리십니까!"
이성이 수양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수양이 시선을 피하자 이성이 웃으며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연못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래, 그날 밤 이후 내 생각이 나지 않았소?”
수양이 부끄러워하며 대답이 없자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내내 그대 생각만 하였소.”
이성이 걸음을 멈추고 수양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툭툭 봄비가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