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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Sep 18. 2024

오! 수양

  동헌의 뜰에서 서성이던 이성이 웅삼을 발견하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래 수양은 만났느냐? 답서는 받아 왔느냐?”


  “도련님, 체면을 좀 지키시어요. 누가 볼까 걱정입니다요.”


  웅삼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뭐라고 하더냐?”


  “아이고 참말로 애틋해서 못 보겠네요. 너무 기대는 마소서.”


  “왜? 수양이 뭐라고 했길래?”


  이성이 숨이 넘어갈 듯 웅삼을 재촉했다. 


  “예상했던 대로 만만치 않았습니다요. 어찌나 기세가 등등한지, 예사 기생이 아니더구먼요. 과거 급제나 하고 자기를 찾으라고 하면서 쌀쌀맞게 등을 돌리지 뭡니까.”


  “뭣이라! 허……, 거 참 당돌한 여인이로고!”


  이성은 은근히 흡족했다. 오매불망 답서를 기다리긴 했으나 내심 쉽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에게나 쉽게 허락하는 여인이 아닌 것은 확실하구나! 그 정도면 되었다.’


  “그래도 편지를 돌려주지는 않았습니다요. 가슴에 꼭 품고 총총히 방으로 들어갔습죠.”


  이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면 되었느니라. 내 직접 수양을 만나러 가야겠구나.”


  “도련님,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요. 사또께서 아시는 날엔 필시 불호령이 떨어질 것입니다. 교방을 드나드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기라도 하는 날엔 관내에 소문이 자자하게 날 터인데…….”


  “내 오늘 담을 넘을 것이다. 너는 다시 수양을 찾아가 자정에 뒤뜰로 나오라 전하라.”


  “도련님…….”


  웅삼이 만류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식경 후에 한가할 때 기별을 넣고 오너라.”


  웅삼이 저녁 어스름에 다시 교방의 문지기와 잠시 수작을 떨다가 몸종 동희를 만나 이성의 말을 전했다. 그날 자정 교방의 담벼락 아래, 웅삼이 소리를 잔뜩 죽여 말했다.


  “도련님, 제가 쭈그리고 앉을 테니 제 어깨를 밟으소서.”


  “그래, 내 이 신세는 잊지 않으마. 아파도 조금만 참거라,”


  이성이 웅삼의 어깨를 밟고 벽을 지지대 삼아 짚었다. 


  “웅삼아, 조그만 더 일어서 보아라.”


  웅삼이 두 다리를 후들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그렇지. 조금만 조금만 더…….”


  이때 이성이 중심을 잃고 한쪽 다리가 웅삼의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웅삼이 한쪽 팔로 기울어지는 이성을 받쳤다. 웅삼의 어깨가 쓸리면서 통증을 호소했다.


  “아이고, 도련님, 이놈 잡겠습니다요. 이놈 어깨가 영 못 쓰게 되겠구먼요.”


  “좀 조용히 하거라. 사람들을 모두 깨울 참이냐!”


  “잘 좀 해보십시오. 더는 못 버티겠습니다요.”


  “그래, 그래, 조금만 참거라.”


  자정의 거리는 불빛 하나 없는데도 유난히 훤한 느낌이었다. 이날 따라 보름달이 휘엉청 밝았고, 달무리마저 넓게 퍼져있었다. 


  “되었다!”


  담벼락에 매달려 웅삼의 어깨에서 발을 뗀 이성이 힘겹게 교방의 뜰로 몸을 던졌다. 웅삼이 욱신거리는 어깨에 손을 얹저 문지르고 있을 때 담 안쪽에서 이성이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웅삼아! 수양이에게 자정에 나오라고 전한 건 확실한 것이냐.”


  “몸종 동희가 전한다고 했으니, 전하기는 했을 겁니다. 나온다는 확답은 받지 못했습니다만.”


  “이놈아 확답을 받아와야 할 것 아니냐.”


  “수양이가 잘도 나온다고 그러겠습니다요. 지도 맘에 있으면 당연히 나올 것이고. 맘에 없으면 바람을 맞힐 것이고. 그다음은 도련님이 알아서 해야 할 일입니다요. 제가 억지로 끌고 나올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요.”


  “이놈이, 내가 한 마디를 하면 열 마디를 하는구나. 알겠다, 알겠어.”


  웅삼이 못마땅한 듯 뒷머리만 긁적이며,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았다.


  자정이 훌쩍 지났지만, 뒤뜰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성이 포기하고 다시 담을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멀리서 불빛이 희미하게 비췄다. 불빛이 가까워지자 두 여인이 형체를 드러냈다. 몸종 동희가 청사초롱을 들고 수양을 데리고 나왔다. 동희는 수양을 안내한 뒤 청사초롱을 들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청사초롱이 멀어지자 뒤뜰에 수양의 그림자가 곱게 드리웠다.  ‘과연 절세가인이로고!’ 


  작정하고 담을 넘어온 이성도 갑자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막상 그토록 그리던 수양을 앞에 두고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몰라 잠시 정적이 흘렀다. 수양의 그림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제아무리 잘 나가는 기생이라지만 여기까지 나온 걸 보면 필시 마음이 동했을 것이다.’ 이성이 마음을 다잡고 겨우 입을 뗐다.


  “혹여, 만나지 못할까 마음 졸였소. 이리 나와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사또 자제께서 밤이슬을 맞으며 교방 담을 넘었다는 게 알려지기라도 할까 염려되옵니다.”


  수양이 여전히 장의로 얼굴을 가린 채 말했다. 


  “내 염려를 하였소!”


  이성이 호탕하게 웃었다.


  “소리를 낮추소서. 사람들이 들을까 염려되옵니다.”


  “그렇게 염려되면 아무도 보지 못할 안전한 장소로 데려가면 될 것 아니오.”


  수양이 난감해하며 머뭇거렸다. 


  “그럼 밤새 이러고 있으려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이곳에도 엄연히 규칙이 있는 곳이오니…….”


  “그렇다면 다른 날을 정해 만나주겠소?”


  수양이 당황하며 이성을 바라봤다. 장옷 아래로 수양의 어여쁜 눈이 달빛에 드러났다. 


  “내 오늘 작정을 하고 온 것이니, 그냥 보낼 생각일랑 마시오. 그대도 마음에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 아니오. 할 말이 많을 것 같으니……”


  “초면에 어찌 짓궂은 말로 저를 당황하게 하시는지요.”


  “짓궂었다면 용서하시오. 내 곡우절을 기다려 그대를 만나 보려 했으나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어 무례를 범하였소이다.”


  이성과 수양이 눈이 마주쳤다. 이성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면 어쩐담.’ 수양이 못 이기는 척 몸을 돌렸다. 치맛자락이 닿을락 말락 바닥을 스치며 앞서 걸었고 그 뒤를 이성이 잰걸음으로 좇았다. 이슬에 젖은 수선화가 달빛을 받고 있는 뜰을 지나 수양의 방에 닿았을 때 소쩍새의 지저귐마저 숨을 죽였다. 사각사각 옷깃이 댓돌을 지나 툇마루를 스치는 소리와 두 사람의 미세한 숨소리까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순간 그들을 가려주는 장막이 사라진 것처럼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댓돌 위에는 꽃 신과 가죽신 한 쌍이 나란히 놓였다. 봄밤의 뜰에는 보름밤 달무리가 은은한 빛을 뿌리고, 다시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교교하게 울려 이팔청춘의 만남을 가려주었다. 이 시각 담 밖에서는 웅삼이 이성의 기별을 기다리고 있었다. 웅삼은 수양이 편지를 가슴에 꼭 품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 만남이 성사될 것임을 예감했다. 

  동이 트기 직전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어스름, 담벼락에 기대어 잠든 웅삼 앞에서 이성이 헛기침을 했다. 웅삼이 미동이 없자 그의 어깨를 슬쩍 흔들었다.


  “웅삼이, 웅삼이.”


  웅삼이 화들짝 놀라 경기를 일으키며 눈을 떴다. 


  “도련님, 어찌 되었습니까?”


  “곧 동이 틀 모양이다. 서둘러야겠다.”


  “뭡니까요? 거기서 밤을 새고 오신겁니까?”


  이성이 아무말 없이 앞서 걸었다. 온전히 잠에서 깨지 못한 사람처럼 웅삼이 고개를 흔들고 손으로 얼굴을 여러번 쓸면서 그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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