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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Sep 15. 2024

작야(昨夜)

  “도련님!”


  밖에서 웅삼이 이성을 불렀다. 이성은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정수리 위로 봄볕이 내리쬐는 정오의 광한루에서 수양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희미해지는 수양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양은 저만큼 더 멀어졌다.


  “도련님, 안채에서 문안 기다리십니다.”


  광한루의 신기루가 사라지고 웅삼이 재촉하는 소리가 꿈속까지 들려왔다. 이성이 눈을 떴다. 순식간에 시간의 동굴로 빨려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낯선 피로감이 몰려왔다. 처마 위로 봄비 듣는 소리가 귓가를 두드렸을 때 비로소 여기가 자신의 거처임을 인식했다. 바람도 없이 곧게 내리는 비는 아직 피지 않은 진달래 봉우리를 건드리거나, 한껏 벌어진 목련 꽃잎을 떨어뜨렸다. 하루 사이 이성의 눈에 세상이 달라 보였다.


  “완연한 봄이로구나!”


  사랑채를 나온 이성이 말했다.


  “안 하시던 봄 타령을 다 하시고, 그게 다 수양이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바람에 없던 서정이 생긴 것 아닙니까요? 봄이 오는지 가는지 언제 관심이나 있으셨습니까?”


  웅삼이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이성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성이 민망한 듯 갑자기 오른팔로 웅삼의 목을 압박했다.


  “아! 도련님, 왜 이러십니까? 아이, 이놈의 숨통을 끊을 작정이십니까?”


  “네가 아무래도 나를 아주 만만히 보는구나! 내가 얼마나 단련된 몸인지 잊었느냐!”


  “알다마다요. 도련님 실력이야 제가 잘 알고 있습죠. 그러니 이 팔이나 풀고 말씀하십시오.”


  “한 번만 더 나를 놀릴 요량으로 입을 놀렸다간 내 진정 실력을 보여줄 테니.”


  “도련님 팔심이 어찌나 센지 하마터면 뒷간 실수를 여기서 할 뻔했지 뭡니까.”


  이성이 오랜 지기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웅삼을 바라보며 웃었다. 웅삼도 격의 없는 친구처럼 허연 치아를 드러내며 바보처럼 웃었다.


  “웅삼아, 아무래도 네가 오늘 교방에 갔다 와야겠다.”


  어느새 웃음을 거둔 이성이 말했다. 웅삼이 이성을 똑바로 바라봤다.


   “도련님, 교방의 담이 얼마나 높은지 아시는지요. 아무나 드나들기 어렵구먼요.”


  “사흘을 기다리기 어려우니, 네가 담을 넘든, 문지기를 매수하든…….”


  “그런 다음에는요?”


  “어허, 말이 많구나.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편지를 수양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편지를 제가 무슨 수로 수양에게 전달한단 말입니까요.”


  “이런 미련한 놈을 봤나, 그런 사사로운 것까지 일일이 일러줘야 할까.”


  이성도 딱히 편지를 전할 방도를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곡우절 행사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자신이 온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랜 지기 같은 웅삼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도움을 줄 것 같았다. 겉으로 웅삼을 닦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삼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문안 후 아침을 먹어도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편지를 쓰다가 상위에 엎드린 채 잠깐 잠이 들었지만, 꿈속에서도 수양에게서 놓여나지 못한 탓에 한숨도 못 잔 것 같이 머리가 멍했다.


  “사또께서 아시는 날엔 제가 제명에 못 죽을지 모릅니다요.”


  웅삼은 사실 이성의 편지를 수양에게 전하는 일보다 사또에게 이 사실이 들통날까 더 걱정이었다.


  “그런 걱정일랑 말 거라. 만에 하나 들통이 나더라도 내 너를 끝까지 보호할 터이니…….”


  “그래도 도련님, 한창 공부할 나이에 기생에게 빠졌다며 호통치실 게 뻔한데……. 후에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릅니다요. 게다가 관기는 사적으로 접촉하는 게 금지되어 있습죠.”


  “그런 건 나도 모르겠다. 정인이 있는 여인을 데려오라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느냐. 아버님께 알려지는 게 두려우면 더욱 은밀히 만나면 될 것 아니냐. 내가 언제 부탁이란 걸 한 적이 있느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도와주는 게 진정한 충성이고 의리니라.”


  웅삼이 포기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교방의 뜰에는 수선화가 지천이고 담장을 넘은 가지에서 황매화가 피어났다. 문지기에게 웅삼이 뭔가를 건네더니 교방의 문이 열렸다. 웅삼이 교방의 뜰을 지나갈 때 수양과 동기인 여진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몸종 동희가 수양을 데리고 나왔다. 웅삼은 수양 앞으로 불쑥 이성의 연서를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사또 자제께서 보낸 서신이다.”


  “사또 자제라면…….”


  “성 도련님께서 지난 봄맞이 행사 때 너를 보았지 무엇이냐. 너를 보고 싶어 하신다.”


  수양은 사또 자제란 말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웅삼이에게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이내 웃음을 거두고 웅삼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지체 높은 양반가의 자제께서 교방에 편지 심부름이나 보내다니! 한심한 도령 아니더냐.”


  수양이 도도한 자세로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웅삼은 그런 수양의 모습이 거슬려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네가 그렇게 함부로 말할 상대가 아니니라. 네게 단단히 마음을 뺏긴 듯하여, 내 이리 무리해서 서신을 전하지만, 우리 도련님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한량이 아니거늘……. 사또의 인품을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않느냐. 그분의 자제이시니 오죽 반듯하시겠느냐. 순진한 도령님 애태우게 하지 말고 얼른 답이나 주려무나. 지금쯤 너의 서신을 기다리느라 목이 한 자는 길어졌을 것이다.”


  “엄연히 신분의 법도가 있고, 교방의 규칙이 있거늘 내 비록 기생이나 사사로이 접촉할 수 없는 신분인 걸 모르느냐? 정 이 수양을 보고 싶거든 과거에 합격한 후 관리로 이곳을 찾으시면 내 친히 모시겠노라 전해라.”


  수양은 웅삼을 뒤로한 채 휑하니 자신이 거처하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자 마음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편지는 왜 저토록 소중하게 품고 가는 것이여. 좋으면 좋다고 말하면 될 것을……. 저렇게 내숭을 떨면서 남정네들 애간장을 얼마나 녹여댔을거나. 참!”


  웅삼이 슬며시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수양의 방문이 닫히자 몸을 돌려 수선화가 흐드러진 뜰을 지나 황매화 가지가 늘어진 담을 따라 교방을 빠져나왔다. 한편 방으로 들어온 수양은 편지를 쥔 손을 포개어 가슴에 얹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사또 자제인 이성을 수양도 알고 있었다. 가끔 행사에 나갈 때면 사또를 따라 나온 단정하고 수려한 미소년의 모습을 기억했다. 언감생심 마음에 품을 수 없는 상대라고 여겼다. 편지를 웅삼에게 돌려준다는 것을 그만 방으로 가져와 버렸다는 것조차 한참 만에 알아차렸다. 보는 이도 없는데 수양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보낸 연서가 지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편지를 읽으면 도무지 마음을 접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애초부터 펼치지 않으려고 입을 앙다물었다. 편지를 개다리소판 위에 팽개쳐놓고선 방안을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했다. 결국 편지를 집어 들어 펼치고 말았다.  

 

  수양버들 광한루 아래로 드리울 때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수양이 곱디고우니

  금석처럼 동여 둔 마음 뺏기고 말았네

  사랑채로 불어온 봄바람에 잠들지 못한 지난밤


  수류광한루하시 垂柳廣寒樓下時   

  춘풍수양려지미 春風垂楊麗至美   

  금석지심탈거의 金石之心奪去矣   

  낭춘풍불면작야 廊春風不眠昨夜  

                                                                                                         성이성(成以性)      


  수양은 편지의 끝에 자필로 남긴 이름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이성의 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을 노류장화 정도로 생각하고 가벼이 즐기고자 하는 마음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양반 자제들과 쉽게 놀아나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기생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보아온 탓에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게다가 그간 애송이 한량들과 고관들이 수양의 머리를 올리기 위해 얼마나 수작을 부렸던가를 떠올리며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평소 수양답지 않게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에 사로잡힌 것처럼 뜻대로 마음을 조절할 수 없었다. 사로잡힌 건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편지를 읽는 순간 마치 그 자리에 돌이 되어버린 사람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분명 수양은 이성을 마음에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마치 오래전부터 연모의 정을 품고 있던 이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밀려 왔다. 마음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편지가 눈에 보이지 않도록 나비장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래도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시선은 여전히 나비장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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