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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Sep 08. 2024

밤이 깊도록 잠 들지 못했다

  구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부터 남원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십이월 초하루 들녘의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지만, 남원으로 향하는 이성의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남원에 도착하자 조경남의 집부터 찾았다. 이성을 맞이한 건 조경남의 아들 조묵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어디 출타 중이시오?”


  “아버님은 이태 전 타계하셨습니다.”


  이성은 순간 까마득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암행으로 조선 팔도를 떠돌다 보니 선생님 안부도 챙기지 못했소, 그려.”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가시지요. 잠자리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아니오. 스승의 장례에도 참여하지 못한 제자가 어떻게 신세를 지겠소.”


  “아버님 생전에 혹시라도 어사께서 남원에 행차하시게 되면 꼭 이곳으로 모시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성은 기묘년(1639년)에 조경남과 함께 광한루에서 밤을 지새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뜨거웠다. 조경남은 이성의 부친 성안의 부사와 각별히 교류하며 지내던 터에, 성 부사의 부탁으로 이성의 교육을 맡았다. 그는 남원에서 이성이 소년 시절을 보내는 내내 한시와 역사를 가르치며 남다른 애정으로 그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이성 또한 임병양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스승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따랐다. 문인으로서 나라가 위급할 때 몸을 던져 헌신하는 실천력과 뛰어난 필력까지 갖춘 스승이 자랑스러울 따름이었다. 


  “선생님의 뜻이 그러하니 실례를 무릅쓰고 하룻밤 신세를 지겠습니다.”


  스승의 아들 내외의 환대로 식사를 마치고 여독을 풀고 있을 때였다. 조경남의 집으로 가마 한 대가 도착했다. 관아에서 이성을 맞이하기 위해 사령을 보낸 것이다. 이성이 가마를 타고 관아로 도착했을 때 부사 송흥주(宋興周)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으셨는지요.”


  “어떻게 소식을 들으시고 먼저 마중을 나오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습니다만.”


  “조 진사의 집에서 사람이 왔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시장하실 테니 요기부터 하시지요.”


  “아닙니다. 조금 전에 스승의 집에서 융숭한 식사를 대접받고 오는 길입니다. 조용히 왔다가 소문 없이 가려고 했는데, 괜히 번거롭게 해드립니다, 그려.”


  “아버님께서 선정을 베푸신 공덕이 있을진대, 어찌 그냥 보낼 수 있겠습니다. 광한루에 술상을 준비하라 일렀으니, 잠시 여독을 풀고 회포를 나누시지요.”


  이성은 혼자 광한루를 찾았다. 늙은 기생(老妓) 여진(女眞)과 서리(老吏) 강경남(姜敬南)이 이성을 맞이하였다.


  “나으리,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여진 문안 올립니다.”


  여진이 우아한 자태로 이성 앞에 절을 했다. 늙어도 기생이라더니 자태나 외모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여진이 이성 앞에 놓인 술잔을 채웠다.


  “남원에 온 지가 얼마나 되었느냐?”


  이성이 따뜻한 시선으로 여진을 바라봤다.


  “여태 그런 질문을 한 이가 없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가만 있자….”


  여진이 세월을 되짚어 보며 추억이 서린 표정으로 변한다.


  “열하나에 이곳으로 왔으니 벌써 서른 닷새가 되었나이다.”


  “그렇담 남원이 고향이나 마찬가지로군. 조 진사께서 이미 세상을 버렸고, 그대라도 이곳에 남아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이제 남원으로 오면 맞아줄 사람도 그대뿐이구려.”


  “소첩을 그리 여겨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기생들을 모두 내보내고 시중드는 소동과 서리와 함께 눈 내리는 광한루 난간에 나와 앉아 소년 시절을 회상했다.     

 

  雪色萬野(설색만야)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竹林階白(죽림계백)        대숲이 온통 희도다

  奶思少年事(내사소년사)    어릴 때 소년 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深夜不能寢(심야불능침)    밤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성이성의 <계서일기>에 수록된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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