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은 아침부터 서둘러 임무 수행지로 떠날 채비를 했다. 주모가 짐을 챙기는 이성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엄동설한 추위에 빈속으로 가시렵니까?”
이성과 호동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주모를 흘낏 쳐다봤다.
“갈 길이 멀어 서둘러 갑니다. 잘 쉬었다 가오.”
이성이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나으리, 죽이라도 한 그릇 자시고 가셔요. 금방 차려 올리겠습니다.”
주모가 길을 막아섰다.
“갈 길이 바빠 지체할 수 없으니 그냥 가겠소.”
“나으리, 그래도…….”
“갈 길이 바쁘다고 그러지 않소. 얼른 비켜서시오!”
보다 못한 호동이 나서 주모를 이성에게서 떼어 놓았다. 이성과 호동이 짐을 잔뜩 실은 두 필의 말을 챙겨 도망치듯 주막을 빠져나왔다.
“나으리, 이번에도 들킨 것 같죠?”
호동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갈수록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으니 분장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겠구나!”
“분장한다고 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요. 가짜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사람들이 더 경계하는 것 같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따로 분장할 필요도 없겠구나. 떠돌이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이렇듯 의복이 남루해지고 갓은 찢어졌으니…….”
“이미 백성들 사이에 암행어사가 전국을 돌고 있다는 게 공공연하게 알려져서 암행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요. 오히려 꾀죄죄한 모습 때문에 더 주목을 끄는 것 같으니, 좀 말쑥하게 다녀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 주막 같은 데선 귀신처럼 알아보니 말입니다.”
“어디 주막뿐이겠느냐 궁벽한 선비집에 하룻밤을 묵어도 마찬가지거늘.”
“암요. 괜히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다 눈치채고 그런 것 같습니다요.”
아침부터 서둘러 나오는 바람에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순천 읍성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으리 배가 등가죽에 붙은 것 같습니다요.”
“조금만 참거라. 읍성으로 들어가면 점심부터 먹자꾸나.”
두 사람은 멀리 성이 보이기 시작하자 발걸음을 재촉했다. 성문에 다다랐을 때 꺽정이 같은 거구의 수문장이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수문장이 의심의 눈초리로 두 사람을 쏘아보았다.
“친적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만.”
“무슨 일로 방문하는 거요?”
“그런 것까지 다 일러줘야 하는 게요.”
이성이 불쾌한 표정으로 수문장을 쏘아보았다.
“요즘 불한당 무리가 극성이라. 짐을 살펴봐야겠소이다.”
“조선 팔도를 다 다녀도 성문 앞에서 불한당으로 의심받은 적은 없소이다.”
이성이 말하자, 호동이 몸으로 가로막았다.
“친척 집은 어쩐 일로 방문하는 거요?”
수문장이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은 채 재차 물었다.
“여행길에 노자가 떨어져 도움을 청하러 왔소이다.”
이성이 이리저리 쥐어짜듯 둘러대는 동안 수문장이 호동과 행장을 곁눈질로 살폈다. 한눈에도 오랜 노숙 생활을 해온 사람들로 보였다. 갓이 찢어지고 옷 모서리가 닳아진 행색이었지만 이성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남루한 행색에 걸맞지 않게 말이 두 필이나 되고 짐도 눈에 띌 만큼 많았다. 수문장이 군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수문군이 달려들어 짐을 빼앗으려 하자 호동이 이를 저지하고 막아섰다. 순식간에 호동을 포박하더니 마구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거 왜들 이러시오. 그만두지 못하겠소.”
이성이 소리쳤지만,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 호동에게서 군사들을 떼어내려 하자 이성에게까지 겁박을 해왔다. 아침까지 거르고 걸어온 터라 허적대기처럼 밀렸다. 이성은 결국 숨겨둔 마패를 꺼내 들었다.
“동작을 멈추라.”
수문장의 눈에 마패가 들어오자 허둥지둥 군사를 만류하고 나섰다. 이성의 발밑으로 수문장과 수문군들이 납작 엎드렸다.
“어사 나으리, 죽을죄를 졌습니다.”
“이 사실을 발설했다간 그땐 정말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예, 나으리!”
이성의 발밑에서 떨고 있는 자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이성은 순천 수행을 포기하고 읍성을 떠났다.
“나으리 이왕 이렇게 된 거, 끼니라도 해결하고 떠날 것 아닙니까. 이러다 쓰러지시겠습니다.”
낙안읍성이 멀어졌을 때 호동이 이성을 나무라듯 말했다.
“벌써 관아로 기별이 들어갔을 것이다. 괜히 사람들이 따라붙으면 골치 아프니…….”
“한양으로 바로 가시렵니까?”
“한양으로 가기 전에 남원에 들렀다 가자꾸나.”
“예전에도 호남으로 암행 나오셨다가 남원에 들리시더만……, 거기 연분이라도 숨겨두신 거 아닙니까요?”
“네놈이 정녕 혼줄이 나고 싶은 게로구나! 아버님께서 부사를 지내실 때 선정을 베푼 곳이다. 내게 가르침을 주신 조 진사의 안부도 궁금하구나.”
이성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마패를 그렇게 쉽게 펼쳐 보이시면 어찌합니까?”
호동이 이성을 나무랐다.
“아니 그럼 네가 맞아 죽을 것 같은데 가만히 보고 있느냐? 다른 방도가 있었거든 말해 보아라.”
“참으로 답답하십니다. 설마 죽이기야 했겠습니까. 제가 날렵하지는 못해도 맷집이 얼마나 센지 잊으셨습니까요. 임무 수행도 못 하고 임금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려고 그러십니까요.”
“잘리기밖에 더하겠느냐!”
이성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나으리, 일부러 신분을 들킨 건 아닙니까?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새털 같을진대 표정이 왜 그러신지요?”
“이놈아 내 표정이 어디가 어떻다고 그러느냐?”
“임 보러 가시는 도령처럼 들떠 보이십니다요.”
“허, 이놈 참! 농이 지나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