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사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목련이 떨어지고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목련 나뭇가지 끝에 앉은 노란 꾀꼬리가 한참 동안 휘로롱 휘파람 소리를 내다가 파랑새와 함께 교목 위로 날아올랐다. 사랑채에서 이성의 아버지 성안의와 스승 조경남이 차를 마셨다. 꼬리에 털이 덜 찬 다람쥐 두어 마리가 담소를 엿듣는 것처럼 돌담 위에 몸을 곧추세우고 멈추었다가, 재빠르게 벽을 타고 나무 위로 달아났다.
“제 자제가 부족한 면은 없는지요?”
“뛰어난 제자를 만나 가르치는 기쁨이 지극합니다. 배우고 익히는 것에 두려움이 없으니,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과찬이십니다, 그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서생에 불과한걸요.”
“심지가 깊고 단단한 재목입니다. 글 속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세태를 알게 해 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선비가 벼슬에 나가더라도 중심이 없으면 어딜 가나 휩쓸리기 마련이니…….”
“그런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에 조 선생님 같은 스승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세태를 묵과하지 않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실천하는 문인의 기개를 배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 기개라면 부친 만한 스승이 또 있을까요.”
조경남이 호탕하게 웃었고, 성안의가 손사래를 쳤다.
“지금처럼 시국이 어지러울 때일수록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궁궐이 피로 물들고 무당이 드나드는 무법천지가 되었다는 소문이 백성들에게까지 파다하게 퍼졌으니…….”
“선군께서 나라를 버리려고 할 때, 왕자의 몸으로 임진년에 의병을 이끌던 기개는 다 어디로 갔단 말입니다.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의병장으로 활약하시던 조 선생께서 마침 고향에 머물고 계시니, 미식이 어리석음을 벗고 의로운 선비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주십시오.”
성 부사는 한 번씩 조경남과 담소를 나누는 사이 은근슬쩍 이성의 배움을 점검하거나 자식을 맡긴 아비로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성안의가 마지막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성이 사랑방으로 들어왔다. 이성과 조경남이 마주 앉았다. 이성이 단정히 앉아 교자상 위에 책을 펼쳤다. 이성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조경남이 표정을 바꾸고 화두 같은 질문을 던졌다.
“충효가 무엇이더냐?”
스승의 뜬금없는 질문에 이성이 의아해하며 스승을 바라봤다.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스승의 눈빛을 보고 이내 답하였다.
“충은 군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모시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고 효는 부모를 공경하며 정성껏 모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과 부모가 의롭지 못한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느냐? 그래도 변함없이 순종하고 받들어야 하느냐?”
“효경의 간쟁장에 따르면 천자가 다투는 사람 일곱 명이 있으면 비록 무도하여도 천하를 잃어버리지 않았고, 제후가 다투는 사람 다섯을 데리고 있으면 비록 무도하여도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아비로서 다투는 아들이 있으면 그 몸이 불의에 빠지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당해서는 자식이 아비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으며, 신하가 임금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의를 당해서는 다투는 것이니 아비의 명령을 좇으면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냐고 하였습니다.”
이성이 망설임 없이 답하자, 조경남이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렇지. 부모뿐만 아니라 임금이라 하더라도 불의에 대해서는 다투어 간하고 말려서 그것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정치적 억압에 맞선 역대의 충신과 열사들은 충효의 이름으로 이를 감당해 왔던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무릇 충효란 막연히 모시고 받드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처사에 불복하고 비합리적 명령에 항거하는 정신을 포함하는 것이니라.”
조경남이 다시 한번 내용의 의미를 새겨주었다. 이성의 마음에 어떤 심지가 돋아난 것처럼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내 오늘은 시 한 소절을 들려주겠노라.”
이성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선생을 바라봤다. 경전보다는 제술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선생이 한시와 역사를 가르칠 때면 시키지 않아도 좋은 글귀를 필사하여 온전히 암기할 때까지 읽곤 하였다.
향내 나는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이고
잘라 놓은 고기반찬은 만백성의 고혈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즐거운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아라
淸香旨酒千人血(청향지주천인혈)
細切珍羞萬姓膏(세절진수만성고)
燭淚落時民淚落(촉루락시민루락)
歡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
조경남이 한시를 읊자 이성이 듣고 감복한 듯 그 뜻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래. 들어본 적이 있는 절구더냐?”
“처음 듣는 시입니다. 탐관오리의 학정을 비판하는 시각이 날카롭고 절묘하여 한 번 듣고는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요?”
조경남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명나라에서 온 조도사가 지은 시니라. 하지만 이 절구는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니라. 일찍이 이백이 비슷한 구절을 노래했고, 김약묵*이 ‘燭淚落時民淚落(촉루락시민루락)’이라는 시구를 취하여 좌우명으로 삼았을 만큼 널리 회자되고 있는 구절이니라. 그러니 명나라 조도사는 이미 알려진 시를 인용해 조선의 임금을 비판한 것이다.”
“명나라에서 온 조도사가 왜 조선의 임금을 보고 이런 시를 남겼습니까? 선군께서 자신의 안위를 살피실 때 임금을 대신해 나라를 지켰다고 들었습니다.”
“왜란으로 혼란해진 시국에 세자로 책봉되고 선군께서 버린 의를 지켜낸 분이시지만 오히려 임금의 자리에 오른 후 그간 보여준 의리를 지키지 못했느니라. 한 나라의 임금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갈 궁리만 하니 백성들은 누구를 믿을 수 있었겠느냐. 백성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었지. 하지만 세자가 적진으로 용감히 뛰어들어 아비가 잃은 민심을 회복하고 왕권을 되찾는 데 공이 컸던 건 사실이지. 지금은 임금의 자리를 지키는 데만 혈안이 되어 백성의 안위는 뒷전이 되어버렸느니라. 바른 소리를 낼 수 있는 군자의 자질을 갖춘 선비들은 이미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고, 임금 옆엔 비위나 맞추며 자리 보존에만 눈먼 자들이 남아 있으니 장차 이 나라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단다.”
이성은 막연하고 분한 마음이 일었다.
“스승님, 나라가 이 지경인데, 선비들은 귀향하여 경전이나 외우고 세월을 보내야 하는 겁니까? 어찌 진정한 충의를 실천하는 자가 없다는 말입니까?”
“임금에게 반하는 소리를 했다간 모두 멸문지화를 면치 못하니. 충의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군이 이를 귀담아들어야 이룰 수 있는 일이니……. 학정이 계속되면 간쟁하는 자는 없을지언정 그 권력 또한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어찌하여 임금께서는 용맹과 의리를 잃어버리셨습니까? 왜 간쟁하는 신하를 죽이시는 겁니까? 무엇을 위해서…….”
열여섯 소년의 마음이 분하고 어지러워 치기 어린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정이 많아 여리기만 한 줄 알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흥분하는 모습을 스승이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 속성이니라. 권력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간 쌓아 올린 모든 공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물론 나라가 도탄에 빠지고 형제 부모가 죽어 나가도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니라. 이렇듯 나라가 어지러운 틈에 타국으로부터 침략이라도 받게 되면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일. 임진년과 정유년의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느니라.”
“저자에 나가면 듣게 되는 소리가 있습니다. 임금께서는 미신과 점쟁이들에게 빠져 궁궐병에 빠졌다고 하더이다. 풍수쟁이들이 말한 곳에 새 궁궐을 짓기 위해 국고를 탕진한다고 말입니다. 이는 그저 저자에 떠도는 소리로 임금을 모함하고자 하는 시정잡배들이 퍼뜨린 말이라고 여겼습니다. 헌데 지금 군께서는 이성을 잃고 위력을 행사하시니 떠도는 말들이 거짓이 아닌 듯 싶습니다.”
“과거에도 미신에 의지한 임금은 자신과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그 끝이 멸망에 이르렀느니……. 임금의 불안을 먹이 삼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간악한 무리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앞으로 군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임금에게 간언 할 수 있는 신하가 되어야 하느니라. 의로서 충을 다하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도, 소중한 가족조차 지킬 수 없음을 명심해라.”
*김약묵(1500~1558) 조선 중기의 문신. 중종 때 여러 관직을 거친 뒤 명종 7년 한산군수로 나갔을 때 검소·근면한 관리로서 표창을 받고, 양주목사를 역임하였으며, 학행이 있어 무성서원에 배향되었다. 동서지간인 김인후가 그의 묘지명을 지었다.